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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Oct 02. 2024

모방은 힘이 세다, 필사 500일째

글쓰기에 도움되는 필사

필사 500일을 맞으며


내 취미 중 하나는 '필사'다. 작년 초 어느 날 '영어필사 100일의 기적'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매일 꾸준히 필사해서 지난 토요일에는 한글필사 500일, 일요일에는 영어필사 500일을 맞았다. 500일이 된 김에 그동안 내가 했던 필사 기록들을 정리해 봤다.


*영어필사책  

- <영어필사 100일의 기적>

- <하루 10분 100일의 영어필사>

- <아침 10분 영어필사의 힘>

- <팝송으로 배우는 스크린 영어회화>

- <영문과 함께 하는 1일 1편 셜록홈스 365일> (전체 필사를 하지는 못함)

잠시 휴식

- 지금은 <노인과 바다> 통필사하고 있는 중


*한글필사책 : 모두 전체 필사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김용택)

- <살아있는 것은 행복하라>(법정스님 잠언집) 

- <어린 왕자>

- <갈매기의 꿈>

- <칼의 노래 1>

- 현재는 <칼의 노래 2> 필사 중



처음 필사를 할 때는 "손으로 글씨 쓰는 것"이 좋아서 시작했다. 노트 위에 나의 손으로 무언가가 써지는 것, 그 자체가 좋았다.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펜을 사용한다는 것, 펜과 종이가 닿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생긴다. 펜과 종이가 닫는 사각사각 소리, 종이 넘기는 부스럭 소리도 좋고, 종이 냄새도 좋다. 노트를 비스듬히 놓고, 필사할 책을 옆에 두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펜, 연필로 드로잉을 하고, 붓펜, 붓으로 캘리그래피를 하는 것과 필사가 비슷한 느낌일 테다. 십자수, 퀼트, 뜨개질 등 손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필사는 너무나도 잘 맞았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기도 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엄마에게 혼나면서 배운 글씨였다. 엄마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나의 가방을 열어 노트검사를 했다. 글씨를 삐뚤게 쓴 곳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찢어버렸다. 그 부분을 다시 썼어야 했다. 엄마가 무서워서 찍 소리도 못하고 썼다. 엄마가 찢어버리지 않도록 학교에서도 글씨를 잘 쓰려고 노력했다. 그 덕에 선생님들의 칭찬도 많이 받았고, 경필대회(이런 대회도 있었다ㅋ) 1등도 했었다. 교육감이 학교에 방문 오는 날, 담임 선생님 대신 칠판 글씨를 쓴 적도 있었다. 엄마가 나의 노트를 찢는 장면은 아직도 나에게는 깊은 트라우마다. 여동생은 지금도 'ㅇ'를 동그랗게 못 쓴다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도 어른들의 반복된 칭찬이 이 트라우마를 눌러놓게 했다.  

나이 50에 필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손글씨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혼나지 않으면서, 마음껏 나의 글씨를 쓸 수 있어 좋았다.   



필사글을 활용해 글쓰기


필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글을 쓰고 싶게 되나 보다. 남의 글만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몇 년째 미뤘던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블로그의 기본 콘셉트는 '필사'가 되었다.


숭례문 학당에서 진행하는 '천천히 읽기'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내 블로그에 똑같은 제목의 글쓰기 공간을 만들었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골라 한 달 동안 천천히 읽으면서 좋은 문장을 고른 후, 그 문장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김종원)>,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은유)>,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를 읽으면서 썼다.


온라인 필사모임에 가입해서 필사모임 방장이 매일 공유해 주는 필사글을 글감으로도 글을 썼다. 지금까지 쓴 글이 213개. 213일 동안 매일 글을 썼다.   


잠시 가던 길을 잃었다고 무어 그리 조급할 게 있겠습니까. 잃은 길도 길입니다.
- <길을 물으며 길을 찾는다>, 김윤홍


얼마 전 필사모임에 올라온 필사글이다. 단톡방의 방장님이 아침 6시에 글을 올려주니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올라오는 필사글을 읽을 수 있다. 이제 생각한다. 이 글과 연결되는 나의 경험이 뭐가 있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으면 필사를 하면서 또 생각한다. 단박에 생각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예전에 읽었던 책이나 예능, 영화들도 떠올려본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뭔가가 연결되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 기억부터 글쓰기 직전까지, 나의 경험은 무궁무진하니까.

아침에 큰 아이 도서관 픽업해 주고 돌아오는 길에 본 벚나무에 노란 단풍이 드는 것을 보고는 봄의 벚꽃만이 아니라 여름과, 가을, 겨울의 벚나무도 멋지다는 글을 썼었다. 내 차 바로 앞에서 길가에 딱 붙어서 느릿느릿 운전하는 노년의 여성을 보면서, 운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글을 썼었다. 위에 김윤홍 님의 필사글을 가지고 글에는 여행지에서 아이와 일부러 헤매었던 경험을 담았다. 글을 쓰면서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행복했다. 가끔은 사글에 담긴 생각에 동의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나는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쓴다. 주어진 글을 비틀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필사글을 활용하면 글감이 마를 날이 없다. 덕에 나는 매일의 블로그 글을 써나갈 있었다.



사진: Unsplash의 Scott Graham


글쓰기 공부를 하다 보니 만나는 필사의 효용


공저를 쓰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글쓰기 책들에서는 내가 취미로 하는 '필사'를 글쓰기에 활용하라는 조언들이 많다.


하지만 필사를 하다 보면 작가들의 글을 '베끼고만'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필사글을 활용해 글을 쓰다 보면, 필사글에만 기대어 글을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 <필사, 쓰는 대로 인생이 된다>을 읽으면서 내 걱정이 해소되었다. 이 책에서는 마음껏, 적극적으로 베끼라고 한다.


인간은 베껴야 창조를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베끼는 행위야말로 창조를 위한 거름이 된다. 그런 면에서 무조건 열심히 베낄 것을 권한다. 베끼고, 베끼고 또 베껴라.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악보를 수차례 베꼈다. 피카소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릴 적부터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한 것은 다름 아닌 명작 베껴 그리기였다. 권투선수 출신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또 어떤가. 그는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해서 거장이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건축을 독학했는지 의아해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건축계의 거장 코르뷔지에의 도면을 베끼고, 베끼고 또 베꼈다.
 
- <필사, 쓰는 대로 인생이 된다>, 김시현, p59~60


그러면서 아래와 같이 당부한다.


대가가 되고 싶다면 대가의 모든 것을 흡수하라! 그런 다음 자신의 방식으로 습작하라! 무수한 습작을 하다 보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생겨나게 된다. 피카소 또한 유채화 한 장을 그리기 위해 100장의 습작을 했음을 기억하라. 창의력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영감의 뮤즈가 창의력을 선물하는 것도 아니다. 창의력은 지독한 과정을 거쳐 생성된다.
모방-습작-창조라는 과정을 묵묵히 견뎌라! 모방과 습작의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원은 수면 아래 잠자고 있다가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잠들게 된다.

-  <필사, 쓰는 대로 인생이 된다>, 김시현, p59~60



지금 나는 열심히 모방할 때


처음 깍두기공책에 글씨를 배울 때를 생각해 본다. 바르게 쓰인 글자를 보며 베껴 썼었다. 글씨를 아주 아주 아주! 잘 쓰셨던 엄마의 글씨체를 따라 쓰려 애썼었다. 국민학교 때는 일명 'l'에 뱀대가리를 그리는 글씨체를 썼다. 키보드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 무렵이니 그전에는 계속 글씨를 썼다. 나는 교과서 전체를 나만의 노트로 만드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니 글씨를 많이 썼다. 계속 쓰다 보니 나만의 글씨체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만년필로 쓸 때, 연필로 쓸 때, 얇은 펜으로 쓸 때, 두꺼운 펜으로 쓸 때마 다른 글씨를 쓸 수 있다. 또박또박 쓸 수 있고, 귀엽게도 쓸 수 있고, 막 쓸 수도 있다. 내 마음대로 글씨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쓰기도 비슷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열심히 따라 베끼는 거다. 베끼면서 나의 글을 써보려 노력한다. 이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나만의 글을 쓰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 지금은 열심히 대가의 글을 모방할 때다. 그 안에 있는 알맹이들을 쏙쏙 빼먹을 때다. 이제 나에게는  노트를 찢어가면서 글씨 연습시키는 엄마도 없다. 내 의지로, 재미있어서 쓰면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사진: UnsplashJoanna Kosin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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