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해하려다간 내가 못살겠더라.
나는 나를 꽤 섬세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예민한 것일 수도 있고 소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모든 사람이 전부 나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깨닫기 전에는 모두 나 같기를 바랐었던 것 같다. 그 일말의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이 나에게 '세상이 그렇게 안 돌아간다니까?'라고 계속 말해주었지만, 나는 두 손으로 나의 두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세상이 나에게 외치는 음성을, 정확하게 뭐라 하는지는 안 들었지만 그 말투와 느낌은 분명 나를 다그치는 목소리였다는 것을 말이다.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날이었다. 총 3명이었는데, 그중 1명의 친구가 나를 포함한 나머지 2명이 모르는 새로운 친구 2명을 더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때 당시에는 나도 조금은 취기에 내 정신을 맡기고 있던 터라,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 2명이 왔다. 술자리에서 동갑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볼 때 으레 그렇듯, 어색한 손 인사와 고개를 동시에 숙이는 정체 모를 인사법과 함께 5명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 친구 2명은 꽤나 외향적인 친구들이었다. 요즘 MBTI로 표현하자면, 확실히 E였다. 그들의 친화력 덕분에 초반 어색한 시간은 매우 짧았고, 우리는 금방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술이 없었으면 나는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술자리를 가지다가, 새로운 친구 2명 중 1명이 새로운 안주를 시키자고 말했다. 그 친구들이 오기 전에는 원래 내 친구들인 3명이서 어묵탕이랑 계란말이 두 개에다가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양이 부족하긴 했다. 또, 새로운 친구들이 왔는데 계속 먹던 걸로 술을 먹기에는 서로 불편하기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만의' 첫 번째 사건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새로운 친구 2명 중 한 명이 점원을 부를 때 손을 번쩍 들더니, 팔랑거리는 손짓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어, 여기"
응? 나의 무의식은 내 시선을 술잔을 모두 비우지 않은 내 친구에게로부터 점원을 부른 새로운 친구에게로 강제로 옮기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내 친구에게로 나는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비슷한 성향과 가치관을 가진 나의 친구는 점원을 부른 친구에게로부터 나에게 시선을 옮겨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서로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건 아닌데...?'
물론, 대놓고 반말을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점원을 부른 그 친구의 '어'는 단순히 '어'가 아니라, '그래요 당신이 필요한 테이블이 여기에요'라는 의미의 '어'였다. '여기'도 단순히 '여기'는 아니었다. '여기' 다음에 '요'가 나오는 듯하다가 안 나오는, 존댓말도 아닌 반말도 아닌 애매모호한 '여기'였다.
라고 생각하며 그 새로운 친구를 이해하려고 할 때 즈음, 필요한 게 있냐고 친절하게 물어보는 점원의 말을 중간에 끊고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술 이거(술병을 가리키며) 하나랑 떡볶이 하나."
음...? 나는 내가 그 새로운 친구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잠깐은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히 그 친구는 저렇게 말했다. 뒤에 '요'나 '주세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아까 눈을 마주친 내 친구를 쳐다보았고, 어김없이 그 친구도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단 조금 더 서로를 응시하며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받은 우리는 다시 시선을 그 새로운 친구에게로 옮겼다.
주문을 받은 점원은 이런 상황은 이미 많이 겪은 듯, 애매한 기분이지만 확실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고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나는 그때쯤 이미 그 친구가 선을 넘었다고 분명하게 생각했다. 2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봐도 자기 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나이는 상관없지만) 점원에게 말을 끊고 반말을 해버리다니. 나의 이해심은 이미 바닥이 나버렸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크게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지적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고 또, 나의 친구의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그 상황을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어차피 안 볼 사이 아닌가.' 라며 스스로 자위하면서 말이다.
술자리를 가진 지 1시간 정도 지나고 이제 슬슬 자리가 마무리되어가려던 찰나에 그 새로운 친구는 술이 취했는지 갑자기 나의 볼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잡고는 나를 귀여운 아이를 다루듯, 꼬집고 비틀었다.
"야, 너 귀엽다."
'야?' 우리는 동갑이긴 하지만 초면이었기에 술자리 내내 서로 존댓말을 했었다. 그러나 이 친구가 술이 들어가고 취했는지 대뜸 내 볼을 꼬집으며 반말을 했다. 사실 반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나이도 같고 나의 친구의 친구인데 반말 좀 하면 어떤가. 그러나 반말이라도 다 같은 반말이 아니다. 나에게 반말을 해도 되냐고 먼저 물어보고 나의 의사를 확인한 후, 예의가 담겨있는 반말을 하는 것과 사전 합의도 없이 대뜸 내 몸에 손을 대며 '야'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존댓말과 반말 그 자체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건방진 존댓말이 있고 예의 있는 반말이 있다. 20대 초반에 군대에 있을 때 우리 부대는(다른 부대도 거의 비슷하다.) 상병 말호봉 이상부터는 전역이 거의 안 남은 말년과 서로 반말을 하며 말을 편하게 하는 문화(?)가 있었다. 어느 날은 개인 정비 시간에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말년 한 명과 이제 갓 병장이 된 한 명이 서로 반말 모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갓 병장이 된 사람 한 명이 선을 넘었는지 말년 병장이 한마디를 했다.
"내가 말을 놓으라고 했지 예의를 놓으라 했냐?"
갑자기 분위기는 싸해졌다. 갓 병장이 된 그 사람도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바로 죄송하다고 했다.(말년 병장은 꽤 무서운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몇 명은 말을 놓으라고 허락했으면서 예의 있게 말하길 바라는 건 뭐냐며 그 말년 병장을 비판적으로 보곤 했지만, 내 의견은 달랐다. 물론, 그 상황에 분위기, 내용, 말투 등등 디테일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지만,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말년 병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군대 내에서 말을 놓게 한다는 건, 군대 규율상 잘잘못을 떠나, 그만큼 같이 지내온 시간이 있으니 이제는 정말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하고 남은 시간을 보내자라는 '우정'의 표시이지. '맞먹자'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도 갓 병장이 된 그 사람이 조금씩 선을 넘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생활관 내에서 자기가 '실세'인 것을 굳히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위 사례처럼, 반말도 반말하기 나름인 것이다. 그러나 점원에게 반말을 해버린 그 새로운 친구가 나에게 했던 행동과 반말은 나에겐 매우 건방지다고 느껴졌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유형 중 예의가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친구는 예의라고는 우리 집 TV 리모컨처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볼을 꼬집고 있는 그 새로운 친구의 손을 내치며 만지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나는 내가 그 새로운 친구의 손을 내치는 와중에도 이미 그 친구가 나의 행동에 상처 따위 같은 것을 받고, 무안해하는 행동을 예상하며 어떻게 이 분위기를 풀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 친구의 다음 행동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갑자기 정색을 한 나를 '속 좁고 쿨하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어라? 내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말아 버렸다.
그 새로운 친구는 나를 술자리에서 처음 본 사람이 볼을 꼬집으며 대뜸 반말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예전 같았으면 같이 맞대응을 할 나였지만,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맞대응을 하진 않았다. 그 새로운 친구가 애써 스스로 무안해지지 않으려고 나를 이용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 친구의 응석을 받아줬다.
"아, 그래 내가 갑자기 이상했다. 술을 너무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마시자 마셔."
그렇게 그 첫 번째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술자리가 슬슬 정리가 될 때쯤, 새로운 친구 중에 나의 볼을 꼬집은 친구가 아닌, 그 옆에 친구가 갑자기 2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 모두가 동의하는데 어찌하랴. 조용히 노래방으로 따라갔다. 노래방에 들어가자마자 나의 볼을 꼬집은 그 새로운 친구가 대뜸 마이크를 집더니, 노래방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큰 소리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것조차 내 신경을 건드리는 행동이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참을 인을 가슴에 새기며 웃어넘기려고 노력했다. 만약 나랑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친구였다면 아주 혼을 내주었을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그 새로운 친구가 첫 타자로 노래를 시작했다. 흔히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노래방을 가면 나는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핸드폰을 만지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한 명이 노래 부를 때, 상대방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면 분명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 당연한 걸 나는 잘 알고 있기에 노래방에서는 핸드폰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가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그 친구의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아까 전에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건 지나간 일이고, 그 친구가 가끔 노래를 부르다가 뒤돌아 볼 때, '내가 너의 노래를 집중 있게 듣고 있어'라는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충분한 리액션을 하곤 했다. 그 친구는 나의 리액션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고, 뒤를 돌아볼 때마다 나를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오래 쳐다봤다. 활짝 웃는 그 친구를 보고 나는 '그래, 심성 자체가 나쁜 애는 아니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 친구를 마냥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은 그 새로운 친구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발생했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 심지어 자기랑 같이 온 친구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는, 자기 핸드폰만 계속 쳐다보는 것이었다. 본인이 노래를 부를 때는 마치 자기가 그 자리의 주인공인 것처럼 신나게 부르더니,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핸드폰을 켜, 인스타 스토리와 피드를 보기에 바빴다. 그것은 내 가치관과 굉장히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나는 속이 썩어나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저런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었다. 나는 웬만하면 하고 싶은 말은 하는 타입이었기에 참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내 친구의 친구라는 걸림돌만 없었어도 나는 그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 같다.
나는 그 새로운 친구의 행동이 너무 거슬려 나의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 나는 애써서 이 감정을 표출한 '명분'을 찾으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명분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을 때쯤, 그 새로운 친구는 역시 나의 기대에 저버리지 않고 나의 방아쇠를 당겨주었다. 그 새로운 친구는 아까 술자리에서 나랑 눈을 두 번이나 마주친 친구가 노래를 시작함과 동시에 노래를 취소를 해버리곤 이렇게 말했다.
"아, 이거 말고 다른 거 부르자."
오히려 고마웠다. 독사에게 물린 나의 팔을 더 이상 독이 퍼져나가지 못하게 팔을 잘라야 하는지, 아니면 빠르게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서 그대로 나의 팔을 보존한 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빠르게 도끼를 가져와 내 팔을 잘라주는 나의 든든한 전우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한심한 듯 조용히 욕 한마디를 하며(무슨 욕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 자리에서 나와버렸다. 나랑 원래 같이 있던 친구 2명은 당연히 눈치를 채고 나를 따라 나왔다. 나랑 술자리에서 눈이 2번 마주친 친구는 마치 내가 화를 내며 나가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함께 걸었고, 새로운 친구 2명을 데려온 친구 한 명은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노래방에 들어가 자기가 데려온 새로운 친구 2명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고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들어보니 그 새로운 친구는 역시나 내가 왜 갑자기 나온 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상황 설명을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뭐, 당연했다. 내가 언짢아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면 애초에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두 귀를 막고 있는 나의 손을 내려놓은 채 세상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을 똑똑히 듣고 있다. '세상이 그렇게 안 돌아간다니까?' 인정한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 돌아가고 모두가 나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 물론 내가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앞서 말한 상황에서 내가 정답은 아닐지언정 '정석'에 가깝다는, 어찌 보면 오만일 수 있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아직까지 미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나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틀린 게 아닌, 나와 '다른 것'이니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같은 사람 혹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랑만 지내기로 했다. '1+1 = 2'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그 자그마한 빈틈을 찾아, '다름'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나는 혐오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무례한 '부류'들을 그냥 틀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삼자 입장에선 다를지 몰라도, 나한텐 틀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평화를 위해.
처음 보는 자리에서 술 조금 먹었다고 대뜸 반말을 하며 나의 볼을 꼬집으며 "야"라고 하는 것을, 내가 손님으로 여기 왔으니 점원에게는 조금 무례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돈 내고 놀러 왔는데 남에게 피해가 가도록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틀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평화를 위해.
결국, 우리는 우리의 평화를 위해 '나 같은 사람'을 골라내어 내 곁에 두어야 하는 것 같다. 내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모두가 나를 만족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그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애써 이해하려고 곁에 두는 것은 이제는 미련해 보인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나를 지치게 만드는 관계는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평화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 나의 평화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