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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잊고 살았다>

- 내가 전에 소설을 썼었다는 것, 소설을 좋아했다는 것

by 김현정 Jul 20. 2024

며칠 전 어느 오후에, 내가 소설을 좋아했다는 것, 내가 이야기를 좋아해다는 것, 불현듯 떠올랐다. 굳이 생각을 모아 읊조리지 않았는데, 한 잔의 따뜻한 믹스커피를 준비하면서 나른한 오후를 혼자 즐길 때였다.

19년 동안 한 번도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19년 전, 나는 우연히 좋은 기회에 내가 쓴 소설로 신인문학상을 받게 되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소설 등단이라는 선물까지 덤으로 받게 되었다. 신인문학상도 소설 등단이라는 것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시작했을 때였다. 좋은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문학지에 수필을 냈다고 해서, 나는 써 둔 소설이 있어서 그럼, 나도 한 번 내봐야겠다고 여겼다. 친구도 수필로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석사 공부가 끝난 이후로 그 친구와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고 살았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내가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나는 내가 글짓기,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 스스로 자격이 있다,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지금도 애용하고 있는 늘 가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장에 꽂혀 있는 소설 습작에 대한 기본적인 책을 보게 되었고, 관심이 생겨서 한 두 권을 대출해 꼼꼼히 읽어 보게 되었다. 왠지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그 당시의 기억으로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부부모임의 어떤 여자와 나의 삶과 생각을 비교하는, <두 여자>라는 소설을 습작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하는 문예공모전에 내 습작을 접수하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결혼 전에 나는 이런 계획을 갖고 살았다. 지금은 내 재능과 다른 업으로 생계비를 벌어 살고 있지만, 내가 결혼하고 난 후에는 두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공부를 하리라. 사람이 태어나면 자신의 재능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나는 공부를 하여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내가 잘하는 것으로 직업을 갖고 살고 싶었다. 


그 당시 시대에는 결혼하면 거의 전업주부로 살았다. 자식을 키우면서 한 동네의 또래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다과도 가지고 점심도 서로 어울리면서 먹고, 서로 아이들을 봐주고, 지금 시대보다는 더 아날로그 하게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살았다. 나 역시 그랬다. 한 가지 달랐던 점은 아이가 다녔던 YMCA의 동화구연 교실을 2년 정도 다녔고, 거기에서 만난 한 수강생과의 인연으로 한우리독서지도사 자격증까지 갖게 되었다. 잠을 아끼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시간을 가지지 않고, 사람이 태어나면 한 가지 자신의 재능이 있다던데, 나는 내가 알게 되는 재능으로 그에 맞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신념으로 살았었다. 늘 그런 신념으로 나를 알아가려고 노력한 결과였나 보다. 나는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책을 무척 좋아했었던 나를 떠올렸다. 동네 친구들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하고 있을 때 나는 친정어머니가 사주신 100권의 세계명작전집을 열심히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은 책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할부 개념으로 책을 샀었다. 모두의 가정에 책이 수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친정어머니가 어떻게 어려운 형편에 책을 사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물어본 적이 없고 그냥 우리 엄마가 책을 샀다, 그렇게 당연히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려운 시절에 비싼 책을 할부로 사서 읽게 해 주신 어머니가 고맙기 그지없다. 

국어국문학과를 다니게 되었고,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가르치면서 또 어떻게 가르쳐야 잘 가르칠 수 있는가? 에 대한 고민으로 나는 습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린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어떻게 하면 글짓기를 잘 가르치는 것인지, 중등부 고등부를 가르치게 되었을 때에도 글짓기를 논술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제대로 잘 가르치는 것인지 늘 고민이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집에서 공부방 하는 게 쉬운 줄 알아요."

말 끝마다 내가 하는 일에 브레이크를 거는 부부모임의 내 또래 여자가 있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 만난 남편의 남자친구의 여자 친구이었는데 우리는 둘 다 결혼을 했다. 부부모임에서 자주 보는데 내 앞에서든 뒤에서든 나의 험담을 잘했었다. 나는 그녀와 나의 이야기를 한 번 써보자. 그녀에 대한 속상함을 소설로 썼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문예공모전에 글을 냈고, 나의 글은 상을 받게 되었다. 

나는 내가 기특했었고, 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좀 당당해졌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습작했었고,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나의 부족함을 메우고 싶었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만난 그 친구 덕분으로 나는 평소에 써 두었던 소설 몇 편을 냈었고, 나는 한 편의 소설로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소설 등단까지 덤으로, 지역문인협회 활동까지 활동의 영역이 넓어지면 질수록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자녀들을 키우는 일, 집안일 등 시간에 쫓기고 힘이 많이 들었다. 


나는 소설로 신인문학상을 받고, 소설 등단한 것으로 내가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논술을 가르치는 일에 나 스스로 인정과 당위성이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대단한 작가가 될 수 있는 정도의 재능까지는 갖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의 습작은 포기했다. 그리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 하나에만 몰두하면서 살았다. 내가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도, 내 글에 대한 문학에 대한 열정은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생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쓰는 것으로는 밥벌이를 못한다. 생존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그 많은 문학작품에 대한 감동은 다 잊어버렸다. 소설이 어떻게 희망을 주는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소설이 주는 희망, 이야기가 주는 희망, 개연성 있는 이야기가 주는 희망, 그 희망을 나는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고 그래, 소설은 이거야, 소설은 사람에게 깨닫는 힘을 줘, 소설이야말로 사람이 읽을 가치가 있는 거야, 소설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소설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내가 잊고 살았던, 내가 그전에는 몰랐었던 소설의 가치를 깨달은 그날, 나는 휴대폰의 메모지에 나의 유레카에 대해 적고, 깨달은 그 시점의 페이지를 적고, 그 문장을 따라 적어보고 그 기쁨을 혼자서 마음껏 누렸다. 소중한 유레카였다.

그리고 대학원 다닐 때 하신 어느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희망을 주는 글을 써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반전이 있는 소설, 그 소설에도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써라는 교수님의 말이 19년이 지나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피곤함을 날리려고 한 잔의 믹스커피를 타기 위해 조리대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19년 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막내 여동생의 말, "언니는 소설을 써야 돼."


다시 소설을 쓰고 싶다. 다시 소설을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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