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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리는 미술관 '에스키모'에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부스스했고,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친 채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작품들과 사람들을 계속해서 찍고 있었다.
그녀는 연신 흥분에 가득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저 남자 애인이면 어떨까?"
"저 아이가 저 부부의 딸이면 어떨까?"
그러던 중, 한 남자가 고유리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고유리 씨?"
그의 목소리에 고유리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나왔습니다."
그 남자는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고유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네? 저를요?"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네, 기관에 도착하면 모든 걸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카메라는 주셔야겠습니다."
고유리는 마음속으로 질문했다. '지금 설명해주면 안 될까요?'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서는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카메라를 건넸다.
남자 요원은 카메라를 전해받고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조용히 미술품과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화랑 입구로 걸어갔다.
고유리는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남자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전자펜으로 그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설명을 잘해주는 타입'.
고유리가 저장 버튼을 누르자마자, 남자가 뒤를 돌아 한 손을 모으더니, 고유리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신은 초능력자입니다."
고유리는 깜짝 놀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네?"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미대를 졸업했지요? 극사실주의를 지향했고요.
손과 눈이 빠르던 당신은 꽤 인정받는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캔버스 대신 사진기, 붓 대신 마우스를 잡고 있죠. 상업 사진가로 전향했으니까요."
그의 말은 고유리의 과거를 하나씩 정확히 짚어가고 있었다.
"디지털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네요. 당신의 은밀한 취미까지 설명하려면 말이에요."
고유리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취미까지 안다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
"어렸을 때부터 당신은 웹소설을 보면서 자랐어요.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타입이죠.
당신은 일상의 많은 것들을 사진으로 찍고, 그 안에 작은 상상력을 더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고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말은 너무나 정확했다.
그녀는 일상 속에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하지만 그가 이어서 한 말은 고유리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그런데, 당신이 더한 상상력은 모두 현실이 됩니다."
고유리는 입술을 떨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고요?"
동시에 그녀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고유리는 심혈을 기울여 역작을 만들어냈다.
한가로운 공원의 풍경을 그대로 보고 그린 그림이었다.
공원의 나무, 벤치, 그늘, 잔디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몇 달은 걸릴 일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빠르고 몰입력이 강했다.
그래서 그 작업을 불과 2주 만에 끝내버렸다.
물론 약물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옆에 항상 놓여있던건 편의점에서 파는 각성제였다.
그녀는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 그 그림은 마치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생생하고, 사진처럼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었다.
오른쪽 귀퉁이에 그녀의 사인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녀의 사인은 한 나무 그루터기 위에 쓰여졌다.
작업을 마친 고유리는 편의점에서 파는 진정제를 들이키고, 깊은 잠에 들었다.
그녀의 그림은 이후 대학 전시에 걸렸고,
한 수집가가 그림을 사갔다.
'이 그림은 정말 인상적이네요. 색다른 감동을 주는군요.'
수집가는 말했다.
얼마 후, 공원을 다시 방문하여 그녀가 그림으로 재현한 그 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익숙한 사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그렸던 그림 속에 있던 그 나무 그루터기…
그 나무 그루터기에 분명히 자신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 당시에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림을 본 누군가가 새긴 것일 거라고 조금 감동을 받고 그렇게 넘어간 일이었다.
그 때, 그들의 대화가 너무 오래 계속된다고 생각했는지,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이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여성의 눈빛은 날카롭고 경계심이 가득했다.
고유리는 재빠르게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이 여자가 뭐지?'
그녀의 생각은 빠르게 굴러갔다.
고유리는 휴대폰으로 자신의 옷 주머니를 찍었다.
그리고 전자펜으로 글씨를 썼다.
'순간이동 장치'
고유리가 저장 버튼을 누르자마자,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낚아챘다.
"고유리 씨!"
여성이 고유리에게 소리쳤다.
남자 요원은 여전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 분은 제 동료입니다.
당신의 능력은 위험도가 높습니다.
저희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여성은 그녀에게서 가방을 가져갔다.
고유리는 여성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리모콘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여성 요원은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를 둘러보았다.
남자 요원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자신의 능력을 깨달았군."
정이나는 정호산과 함께 컴퓨터에 떠오른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공원에서 귀를 막고 있는 여자와 그 옆에는 자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노래 연습을 하는 소녀 옆에는 유리창이 깨져있었다.
그리고 들판에서 뛰노는 소년 위에는 번개가 그려져 있었다.
정이나가 말했다.
"공원에 있는 여자는 주지영이에요.
노래 연습을 하는 소녀는 어린 이시연이고,"
들판에서 뛰노는 소년을 가리키며 정이나가 말했다.
"이 애는 전우성의 어린 시절이에요."
"다 편집된 그림이야. 원본 사진은 다음과 같아."
정호산이 말하며 화면을 넘겼다.
바뀐 화면에는,
공원에서 귀를 막고 있는 여자와, 조깅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노래 연습을 하는 소녀 옆에는 멀쩡한 유리창이 있었다.
그리고 들판에서 뛰노는 소년 위에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정호산은 정이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다 고유리의 상상력 때문에 생긴 일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