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의 유혹, 단기 성과와 신뢰의 감가상각
"중요한 보도자료라 한 문장만 더 강하게 표현하면 안될까요?"
지난주 회의실에서 들린 말이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임원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키보드 앞에서 잠깐 멈췄다.
한 문장만 더 강하게. 얼마나 익숙한 요청인가.
그런데 이 순간, 우리는 '사실'과 '진실'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
먼저 이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사실(fact):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데이터 - "20% 개선"
진실(truth):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 맥락과 의미가 담긴 메시지
"업계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은 완전한 거짓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업계'의 범위가 모호하고, '최고 수준'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면?
이것은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하지 않은 메시지가 된다.
이런 상황은 PR 실무에서 일상이다.
"10% 매출 성장"을 "사상 최대 실적"으로
- 수치는 사실이지만, "사상 최대"라는 표현의 기준이 모호하다
"모바일 최적화 UI"를 "혁신적인 모바일 경험"으로
- 기능 개선은 팩트지만, '혁신적'은 주관적 해석이다
"예상 실적"이 "실적 달성 기대"로
- 예상을 기대로 바꾸는 순간, 확실성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각각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우리는 숫자를 조작하지도, 사실을 왜곡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순간,
사실과 진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실제 사례를 보자. 한 IT 기업의 보도자료 수정 과정이다.
초안: "클라우드 서비스 응답속도가 20% 개선되었습니다."
1차 수정 (팀장 의견): "혁신적인 기술로 클라우드 성능 20% 개선"
2차 수정 (임원 의견): "업계 최초 혁신 기술로 클라우드 성능 대폭 개선"
최종: "세계 최고 수준의 클라우드 기술력 입증"
어느새 '20% 개선'이라는 사실은 사라지고, 검증 불가능한 수식어만 남았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상한 건, 아무도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마케팅팀: "경쟁사 대비 차별점을 부각해야 합니다"
영업팀: "고객들이 임팩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경영진: "기자들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였다.
'조금 더 강하게'라는 요청이 단계별로 쌓이면서,
어느새 우리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며칠 후,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의 기준이 뭔가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획팀도, 개발팀도, 누구도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주목'을 얻었을지 몰라도, '신뢰'는 잃고 있었다는 걸.
신뢰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 더 강조하자'는 작은 결정들이 누적되면서,
브랜드의 언어가 서서히 '진실에서 먼 말'로 이동하는 것이다.
신뢰 손실의 실제 비용
기자는 다음 보도자료를 받았을 때 조금 더 의심스러운 눈으로 읽었다.
고객은 우리 발표를 들었을 때 '또 과장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점점 쌓이는 비용. 바로 '신뢰의 감가상각'이었다.
경험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문장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이 표현이 6개월 후에도 같은 의미일까?"
초안을 쓸 때는 핵심 팩트가 명확한지,
수치의 비교 기준을 설명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검토할 때는 수식어가 팩트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경쟁사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닌지 돌아본다.
"기자가 근거를 묻는다면 답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건 최종 단계다.
기자가 팩트체크를 요청했을 때 당당히 답변할 수 있는가?
이런 작은 망설임과 질문이 브랜드를 지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업계 최초", "세계 최고", "혁신적인", "대폭", "획기적으로", "사상 최대" 같은
표현이 들어가는 순간 한 번 더 멈춰 서야 한다.
이런 단어들이 들어간 문장은
대부분 사실과 진실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신호다.
"이 표현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회의실에서 이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모두가 '임팩트'를 원하는 상황에서 '신중함'을 말하는 건,
때로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작은 용기가 브랜드의 신뢰를 지킨다.
눈길을 끄는 문장은 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진실을 담은 문장은 다르게 써야 한다.
강한 말보다 정직한 구조가 오래간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드는 건,
회의실에서 용기 있게 질문을 던지는 우리의 몫이다.
※ 이 글은 2025년 출간 예정인 PR 글쓰기 실전 가이드북의 가제 『전략의 문장: 브랜드의 운명을 바꾸는 PR 글쓰기 실전 가이드』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