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서 샀던 세탁기에 문제가 생겼다. 벌써 17년째 탈 없이 잘 쓰고 있었는데, 소음이 심해지고 빨래가 잘 되지 않았다. 나름 세탁조를 청소해 봐도 소용없었다. 뒷베란다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 세탁기를 너무 몰라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AS센터에 문의했더니 새로 사는 게 낫다는 답을 돌아왔다. 세탁기의 사용기한은 6년이고, 오래 써도 10년이라는데 나는 17년을 넘게 썼으니 할 말이 없었다. 세탁기에게 고마워할 줄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이젠,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결혼하자마자 신혼집에 들였던 세탁기는 13kg였다. 그게 부족한 줄 모르고 오랫동안 써왔다. 두 아이가 16살, 11살이 되도록 세탁기의 용량이 작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즘 가전제품은 무조건 큰 걸 선호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13kg면 충분하겠지 했다.
남편과 마트를 찾아 세탁기를 둘러봤다. 매장에 진열된 21kg, 25kg짜리 세탁기를 보니 근사했다. 우리 집 세탁기는 어떻게 4인 가족의 빨래를 해왔을까. 신상 세탁기는 값비싼 만큼 디자인도 멋졌다. 예상치 못한 지출을 해야 하니 고민이 되었다. 언제나 남편의 단호한 결정이 나를 살리는데, 이번에도 통했다.
신상 살 필요가 뭐 있어? 인터넷으로 저렴한 거 사자.
결국 인터넷으로 최저가 21kg짜리 드럼 세탁기를 찾아냈다. 어딜 봐도 이런 가격은 없었다. 2025년 신제품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서 17년간 함께 해준 세탁기에 비하면 신상에 속했다. 망설이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단숨에 주문하고, 집으로 온 날, 헌 세탁기를 설치 기사님께 드리고 새 세탁기를 뒷베란다에 놓았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온 것처럼 가슴 뭉클하고 설렜다. 세탁기 바꾸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가슴이 찡해졌을까.
기본 코스만 1시간이 넘게 걸리던 '헌 세탁기'에 비해, 새 식구는 단 17분 만에 세탁을 끝내버렸다. 원래 세탁기 돌리려면 1시간 정도는 걸리는 게 아니었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 세탁기는 일 한 번 빠르게 해냈다. 세탁기 돌리는 재미가 있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 건조기까지 돌리는데 1시간 남짓 걸리니 신이 났다. 남편과 나는 시골에 살다 도시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세탁기가 고장이 날 정도로 17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 그 세월을 울고 웃으며 함께 견뎌온 남편과 손을 맞잡아봤다. 우리는 지난 17년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떠나보낸 세탁기가 소중한 줄 모르고, 마구 험하게 빨래를 돌렸던 세월을 반성한다. 앞으로의 결혼 생활은 고장 난 곳이 없는지, 힘든 부분은 없는지 자주 들여다보고, 고쳐가며 해나가야겠다. 세탁기를 바꾼 덕분에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 헌 세탁기에게 더 미안하고 고마워진다.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