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과 지천명 사이에서

by 글쓰는 워킹맘
요즘 잠잠하다 했더니만, 화 낼 일을 찾아다니는 거야?



아이들 논술학원 선생님과 통화하다 화를 내버렸다. 학원 시스템의 문제로 학원비가 결제되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내가 미납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신 것이다. 단 한 번도 학원비를 제 때 내지 않은 적이 없는데 황당했다. 문제는 그 통화를 밤늦게 하느라 나의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 비난 아닌 비난을 들어버린 것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열흘 간 선생님은 내게 학원비 내시라는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30분 간의 통화는 나를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었다.


밤늦게 운동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끄덕거리며 잘 들어주다가, 무심히 툭 내뱉었다. 요즘 잠잠하더니 화 낼 일을 찾아다니고 있냐는 것이었다. 순간 뜨끔했다. 남편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아차릴 때가 많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크게 화를 낼 일이 있어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감정선이 둔탁해지는 것 같았다. 꽤 노력해서 화 낼 일을 만들지 않으려 애썼던 것도 있다. 화를 내면 나 자신이 감당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요하던 일상에 기름을 부어버린 듯 화가 나니 손이 떨리고, 두서없이 말을 하게 되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두근댔고, 얼굴이 벌게졌다. 남편의 말에 남은 분노를 털어내고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화 낼 일을 찾아다닌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잘못된 패턴에 빠져 있었다.


그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학원 본사에 정식으로 제시할 사건 개요와 발단, 요구사항을 적어 넣은 세 페이지 보고서였다. 나는 분노의 남은 찌꺼기까지 모두 가라앉혔다. 감정을 돌보기 위해 글쓰기만큼 좋은 게 또 없으니 말이다.


40세 : '불혹(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50세 :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


내 나이 마흔여섯. 여전히 화가 난다. 날카로운 말로 누군가를 아프게 할 때도 있다. 나는 불혹과 지천명 사이에서 지천명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갈대처럼 흔들린다. 나이 쉰이 되었을 때까지 하늘의 명을 깨달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나 자신을 향한 불신감으로 가득하다. 20대, 30대에는 40대, 50대가 되면 온화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만 알았다. 그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화 낼 일이 별로 없겠다 싶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아직도 화를 내고, 후회한다. 불혹과 지천명 사이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분노하고, 반성하며 하루를 산다.


빠르게 뉘우치고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한 덕분에 선생님과의 문제를 잘 마무리했다. 본사에서도 내가 제안한 방식으로 시스템을 개선하겠노라 답을 해왔다. 다행이다. 내가 직접 불을 지른 것이나 다름없지만, 서둘러 화재를 진압한 셈이 되었다. 뜨거운 여름, 내 마음까지 불타오르지 않게 매일, 매 순간 나를 들여다봐야겠다. 이 여름을 무탈히 보내야겠다. 나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pexels-freestocks-987585.jpg 출처 : https://www.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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