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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한 문장씩 – 그림책과 함께한 리더스의 시간

by 겨울

처음엔 글자보다 그림이 많았다.

노부영의 알파벳 리더 한 권을 펴고,

세이펜으로 단어를 톡 찍으면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아이의 손은 아직 ‘읽는’ 손이 아니었고,

귀는 이야기보단 리듬에 먼저 반응했다.

외출할 때 차 안에서도 음원을 들었고,

송북을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며 반복해서 들었다.

그 소리들은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고,

의미를 몰라도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어들이 늘어갔다.


파닉스보다 먼저 해야 했던 건,

바로 사이트워드였다.

그림책과 리더스북 속에서

'보자마자 알아야 하는 단어들'은

파닉스 규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the’, ‘you’, ‘said’ 같은 단어들은

놀이처럼 반복해서 노출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눈에 익고, 귀에 익었다.

사이트워드 카드를 짝 맞추듯 놀고,

음원을 따라 부르며 단어를 흡수하듯 익혔다.

리더스북은 그렇게 그림책 옆에서 자라났다.


제이와이북스의 JFR, Learn to Read,

엘리펀트피기, I Can Read 1, 2, 3과

Step into Reading 1,2,3,4시리즈,

Usborne Reading, ORT까지.

그 시절의 책들은

줄거리가 재밌거나 완성도가 뛰어나다기보다

쉽고, 짧고, 반복되는 구조

아이가 ‘나도 읽을 수 있어’라고 느끼게 해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읽기에 막 들어선 아이에게는

무조건 많은 책이 필요하다.

쉽고 재미있고, 자신감을 주는 책.

단어가 겹치고, 문장이 반복되고,

주제가 익숙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

그런 책들이 ‘읽기의 기초체력’을 만든다.


아이의 책장에 다양한 리더스북이 들어올수록,

나는 한 단어를 여러 문장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하려는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건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복을 위한 다독이었다.

같은 작가의 시리즈, 같은 주제를 가진 책을

잇는 일은 단어의 의미를 몸으로 익히게 하는

일종의 다리였다.


짧은 문장이라도

소리 내어 읽는 일은 정말 중요했다.

처음엔 엄마와 번갈아 읽었고,

2년 반 동안 매일 하루 2권씩 핸드폰으로

아이의 책 읽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틀려도 좋았다.

중간에 멈추거나, 단어를 더듬더라도 괜찮았다.

소리 내어 읽는 그 순간,

아이는 자기 안의 언어를 확인했고

문장을 리듬으로 기억하며 내용도 함께 익혀갔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영상들을 다시 보니,

신나는 목소리로 책을 읽던 아이의 표정이

단어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단지 기록을 넘어서,

아이의 영어 성장을 고스란히 담아낸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우리 아이도 어느 날은 펜으로 찍어 들으며

조용히 책장을 넘길 뿐,

입을 열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땐 책을 다시 살폈다.

혹시 글밥이 너무 많은 건 아닐까?

문장이 아이의 현재 수준과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읽기를 멈춘 아이를 탓하기보단,

지금 이 책이 아이에게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는 책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봤다.


읽기는 경쟁이 아니었다.

다독은 속도가 아니라 반복이었다.

엄마표 영어에서 리더스북은

어휘력이나 리딩레벨을 키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읽기 자신감’을 키우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림책이 여전히 옆에 있는 동안,

리더스북은 아이에게 읽는 ‘기쁨’을 알려주는

가장 첫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누군가는 벌써 챕터북을 읽고 있다 해도,

누군가는 유창하게 읽어내려간다 해도,

우리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건

조바심에 떠밀린 속도가 아니라,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기다림이었다.

괜한 조급함으로 들볶지 않으려고,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지금 이 아이,

즐겁게 읽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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