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속에서 큰아이는 K라 하고, 작은아이는 Y라 하겠다.
K를 임신했을 때 내가 매일 보기를 바라던 연예인이다. 그 이름도 찬란했던 장동건.
당시 내가 귀 기울였던 말이 있었다. 매일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태교 하면 내 아이도 그 또는 그녀와 비슷한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말. 물려받는 유전자의 힘을 그때 나는 간과했다.
양가의 첫 아이다 보니 관심도 기대도 걱정도 넘치게 받았다. 시아버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들이어야 했다. 똑똑해야 하고 더욱이 잘 생겼으면 좋겠다는 철부지 엄마의 욕심과 기대감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K는 이미 부담이 꽤 컸으리라.
태교를 위해 스트레스가 많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좋아하지도 않은 클래식 음악을 듣고, 하기 싫은 한자 공부를 했다. 고전 책을 읽었고 몸에 좋지 않다는 음식은 먹지 않았다. K의 두뇌 회전을 위해 ( 사실은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 하루에 한두 시간 인터넷 고스톱도 했다. 하루를 아이에게 맞춰 보냈다. 내가 하기 싫어도 K에겐 좋을 거라는 생각으로 즐거웠다. 벅찼고, 행복했다. K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예정일은 12월 24일이었다. 예정일 날짜를 듣고 종교가 없었음에도 K는 분명 크게 될 아이라는 믿음까지 더해졌다. 생각하는 능력이 멈춘 듯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예정일을 보름 남짓 남기고 몸에 이상이 생겼다. 걸을 수도 없었고, 대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산통이 아닌 고통이 밤새 나를 괴롭혔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엄마의 몸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K는 세상을 빨리 보고 싶었는지 서둘러 밀고 나오려는 통에 장기가 눌려 있었다. 엉겁결에 한 출산 장동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부푼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입원실로 돌아와 K 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데리고 온 K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눈, 코, 입 어느 한 구석도 장동건의 모습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아버님을 쏙 닮은 시동생인 것도 같았다. 태교는 유전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벌겋고 쭈글쭈글한 K와의 첫 만남은 놀라움과 약간의 실망감이었지만,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너무 꽉 안으면 아파할까 조심스럽게 안아 첫 모유를 수유했다. 벅찬 감격에 괜히 울컥하는 뭔가가 올라왔다. 울먹이며 남편에게 말했다.
"장동건 하나도 안 닮았네. 사진을 더 많이 바라볼걸..."
유전자의 위력을 보여준 K가 어느새 세 살이 되었다. 문득 혼자 노는 K가 안쓰러워 보였다.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딸을 원했고 나는 K를 위해 아들을 원했다.
Y를 임신했을 때 내 주변 상황은 여러 가지 일이 얽혀 몹시 복잡했다. 뱃속 Y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태교는 그저 삶에 집중하는 거였다. K 때와는 달리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게 전부였다. Y는 태어나자마자 체온이 오르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었다. 바로 안아 볼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뒤 비로소 안아 본 Y는 딸임에도 제 오빠와 똑 닮았다. 심지어 조금 더 못생겼다. 둘은 쌍둥이 같았다. 누가 손해일까? 오빠가 아니면 여동생이?
외모가 비슷한 두 아이는 자라면서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K는 온순하고 영리했다. 사람을 잘 따랐고 내 품을 좋아했다. 반면 Y는 예민했다. 밤마다 울었고, 그 울음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낯을 많이 가리면서도 내 품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넘기는 방법도 달랐다. K는 아빠와는 좀 부딪혔지만 나와는 대화라는 걸 할 만큼은 되었다. Y는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심지어 화를 참지 못한 내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챈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아이는 내게 말했다.
니도 안다. 두 아이는 절대 내가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두 아이의 외모는 유전자 탓일 테고, 나머지는 어디서 온 걸까?
맞다. 강한 유전자의 힘으로 장동건을 닮을 순 없었을 테지만, 두 아이가 가진 정반대의 정서는 태교가 답이다. 이십 년이 넘는 동안 두 남매를 키우며 수도 없이 부딪히며 깨달았다. 이제 나는 믿는다. 임신 당시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이 고스란히 태아에게 간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