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연습을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잡념을 지우고 음에 초점을 맞추고 반복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은 사념이 주위를 떠다닌다. 호흡을 하고 작곡가가 남긴 음표들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후르륵 가볍게 읽어본다. 초견*이기 때문에 양손을 볼 수도 있고, 어려운 구간은 멜로디만 쳐볼 수도 있다. 몇 페이지 정도인지, 악장 구분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중간에 빠르기가 바뀌는지, 음악기호나 작곡가가 특별히 써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찾아보기도 한다. 대부분의 악보 출판사 편집자가 따로 있는데, 이 편집자들은 굉장한 연주자이거나, 음악학자 또는 작곡가의 제자이다. 이 편집자들이 남긴 메세지도 찾아본다.
*초견 : 처음 악보를 보는 것. 전체적인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곡을 읽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확히 모든 음표와 템포를 다 정답 맞히듯 맞힐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한 번에 모든 음과 악상기호, 템포 등을 다 지키면서 칠 수 있다면 아주 아주 좋다.
하나의 곡을 출판사에서 다른 편집자 판으로 각각 출판하기 때문에 시간이 된다면 다른 편집자도 찾아보거나 다른 출판사의 판본도 찾아본다. 대체적으로 악보 보기가 수월하게 깔끔한 정도의 차이가 있고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더 깊이 살펴보면 음악악상기호의 위치가 조금 앞이거나 뒤에 있거나 없거나, p(피아노:여리게)가 mp(메조피아노:조금 여리게)이거나 pp(피아니시모:아주 여리게)로 표기되는 경우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는 연주자의 해석의 차이로 볼 수도 있어서 작곡가의 표기는 ‘매우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어떻게 연주할지 연주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말 아주 드물게 출판사나 편집자에 따라 음정이 다르기도 하다. 그럴 때는 조금 복잡해지는데 나의 선생님의 도움을 받거나 동료들에게 물어본다. 자주 연주되는 곡인데도 악보에 음표가 다르다면 그냥 익숙한 음으로 연주한다. 작곡가가 정말 간혹 깜빡하고 잘못 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출판과정에서의 오류이거나. 어쨌든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일이백 년 전의 기록들이므로 적당히 맞춰간다. 이러한 감을 기르기 위해 그 긴 시간을 악기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빅 데이터이다. 이 빅데이터는 급한 연주를 받거나 여유가 없을 때 주어진 악보만 보고 냅다 달릴 수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악보는 깔끔하고 해석의 차이를 떠나 일단 마디수가 잘 쓰인 악보를 좋아한다. 마디수는 몇 마디인지 보기 쉽게 적힌 숫자에 불과하지만, 연습을 계획할 때 편하고 특히 함께 연주하는 앙상블이나 여러 사람이 같이 연주할 때 마디수가 쓰여있지 않으면 하나씩 마디 수를 세어가며 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5분 내외의 곡을 연주한다면 곡의 빠르기에 따라 다르지만 80마디에서 200마디 정도를 다 세어야 해서 귀찮다. 세다가 틀리면 다시 세어야 한다.
대략적인 흐름이 느껴진다. 듣기만 했을 때는 명확히 들어오지 않던 화성진행, 특별한 음계들, 숨은 멜로디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내 앞에 있다. 이제 연습으로 나아갈 때다.
손가락 번호를 확정시킨다. 관악기의 경우는 호흡할 곳을 정하고, 현악기의 경우 활 쓰기(보잉)을 확정시킨다. 잘 모르는 길은 내비게이션이나 지도를 참고하면서 길을 가듯, 손가락 번호도 그런 역할을 한다. 굉장히 많은 음과 긴 음악을 연주하기 때문에 긴장되면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나를 위해 근육이 외워주길 염두하여 꼼꼼하게 확정시킨다. 이때 편집자가 악보에 써둔 손가락 번호들을 참고한다. 멜로디, 화성진행, 편안한 손 움직임들을 고려하여 써둔 손가락 번호들이지만, 그들은 대부분 건반 10~12도** 정도는 척척 닿는 유럽인들이기 때문에 10도가 겨우 닿는 손인 나에겐 약간의 참고 사항이 돼줄 뿐이다. 음악의 흐름과 테크닉 등을 고려해서 손가락 번호를 정한다. 가장 단시간에 빠르게 정해야 하는 과정이다. 한번 잘못 든 근육 길은 생각보다 멀리 돌아가게 만든다. 그래도 돌아오긴 한다. 열심히 정해둔 길이여도 연습을 하며 또 바꾸기도 한다.
**도는 음과 음사이 거리를 가리키는 말로 도레미파솔라시도는 8도이며, 10도는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까지, 12도는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파솔까지이다.
이제 진짜 연습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