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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윤재 Jul 19. 2024

온 세상을 누빌 수 있다면

일곱 번째 이야기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을 조금씩 섞어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아버지는 주변 모든 사람이 착하다고 할 정도로 얼굴만 봐도 순박하고 온화한 사람이다.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거의 없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받은 적도 없다. 심지어는 그가 무엇을 하겠다고 해도, 조심스러운 아버지는 만약의 위험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는 아버지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부딪혔다기보다는 아버지의 말을 그냥 듣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보행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위험하게 어떻게 혼자 다니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백 퍼센트 불가능한 일은 없으며 자신도 훈련하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응수했다. ‘엄마도 일하고 아빠도 일하는데 내가 누구랑 어떻게 다녀? 혼자 다녀야지.’라는 반항심이 마음에 차올랐다. 그가 불굴의 의지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할 때부터는 오히려 어머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닮아 합리적이고 실용적이고 빠릿빠릿하다고 했다. 어머니와는 말투도 식성도 비슷한데, 특히 중요한 순간에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력이 스스로에게서 나타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온순한 성격과 어머니의 빠른 두뇌회전의 결합체 같다고 말했다. 그런 그는 늘 웃는 얼굴로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는 강단과 용기가 있었다.

  ‘공간’은 언제나 그의 관심을 끌었다. 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각은 없어도 그는 사감(四感)을 동원하고 마음속으로 공간의 지도를 만들어가며 궁금한 것은 모두 알아내려고 했다. 어릴 때 보령에서 자전거를 타며 마을을 누볐을 때도 자신이 아는 세계 전체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 작은 동네가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시기를 지나 서울에 오고 나니, 세상이 정말 넓다는 것을 체감했다. 열네 살의 나이에도 그는 서울 전부를 만나고 전부를 알고 싶어졌다.

  혼자서 새로운 장소의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비장애인처럼 지도를 보고 따라서 걷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곳을 가려면 출발하기 전에 미리 지도를 찾아보고 계획을 해야 한다. 처음 가보는 카페를 가려면,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몇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근처에 가서 행인들에게 물어볼 수라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에 가만히 있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는 눈이 보였으면 서울에서 안 가본 골목이 없을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을 것 같다고 한다. 등산을 하거나 백화점에서 구경을 하는 것처럼 시각장애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들도 마음껏 했을 것 같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는 그가 서울을 누비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날에는 무작정 대중교통에 올라탔다. 행선지를 미리 생각하면 외워야 할 것이 많으니까 일단 몸을 실었다.

  대중교통에 많이 익숙해진 스무 살 때부터는 아무 곳에나 자신을 데려다 놓은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훈련이라면 훈련, 놀이라면 놀이를 했다. 처음 보는 곳에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시각장애인에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언정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인생은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니까!" A 씨는 어디로 튀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 버스나 타고 다섯 정류장을 가서 내린다. 그 정류장에서 또 아무 버스나 타고 다섯 정류장을 가서 내린다. 그리고 그 정류장에서 또 아무 버스나 타고 다섯 정류장을 가서 내린다. 

  처음 이 무서운 연쇄적 버스 타기 놀이를 시도했을 때 그는 강남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바글바글하게 느껴지는 인파에 조금은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핸드폰에 있는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음성안내를 듣고, 길을 잃을 것 같으면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그렇게 해서 아무 지하철역이나 찾아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는 수년간의 걷기 노하우를 양껏 활용해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이 놀이에서 수 차례 승리를 거둔 그에게 이제 서울은 무서울 것이 없다.

  공간에 대한 관심을 물리적으로 충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그는 일 년 사이 폭발적으로 서울 곳곳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을 때는 버스를 타고 여태껏 가보지 않은 지역에 가서 길을 걸었고, 주말에는 부모님을 붙잡아 차를 타고 서울 방방곡곡으로 가보았다. 자투리 시간에는 인터넷으로 각 지역의 랜드마크와 입지와 교통과 부동산에 대해 공부했다. 처음에는 지도를 볼 수 없어 지하철노선도를 무작정 외우고 각 역별로 특징을 기억하려고 했다. 집요하게 서울에 대해 파고든 그는 이제 서울 거의 모든 동의 이름을 알았고, 구별로 대강의 부동산 시세를 알고 있었다. 왜 이 지역은 이렇게 집값은 비싼지, 왜 바로 건너편의 이 두 아파트 단지는 가격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지, 전세가 매매가의 격차에는 어떤 요소가 가장 많이 관여하는지, 그는 이런 질문을 늘 머리에 달고 살았다. 그는 전공인 사회복지학보다 취미로 공부하는 부동산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언젠가 적당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건물주를 꿈꿀 수도 있겠다. 그는 원래도 돈을 아끼는 성격인데, 이제는 이렇게 조금씩 모으면 집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 절약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택시를 타는 대신에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고, 끼니도 사천 원짜리 김밥으로 자주 때우던 그의 습관에는 이제 이렇게 명분이 붙었다. 시각장애인 가족협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그는 괜히 설레는 마음이 든다.

  부동산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게 된 이후에는, 주변 시각장애인 친구들이 자취방을 구할 때마다 그를 찾게 되었다. 사실 시각장애인이 혼자 부동산에 가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공인중개사들이 매물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하거나, 왜 시각장애인이 매물을 직접 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시각장애인도 집에 들어가서 바닥과 벽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전체적인 공간감을 느끼면서 집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비장애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집 주변의 사소한 턱 같은 것도 시각장애인에게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어 꼭 주변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동산이 많다.

  더 큰 문제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부동산에 대한 정보의 접근성이 극도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A 씨처럼 지하철노선도 암기부터 시작하는 고행을 통해 부동산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매물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렵게 집을 정한 후에 계약을 맺을 때에도 늘 불안이 시달린다. 계약서에 점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개사들이 계약 내용을 대독해주는 경우도 드물어 계약서 내용도 제대로 모른 채 도장을 찍는 맹인이 많다. 

  따라서 혼자 자취할 곳을 찾아야 하는 친구들에게 A 씨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이다. 나와 만났던 어느 날도, 그는 나와 헤어지고 나서 강원도 소재의 대학교에 진학한 친구를 위해 춘천에 매물을 보러 간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춘천 이곳저곳을 다니며 여러 집을 보며 계약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의 탐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공인중개사에게 주변 여러 주택의 매매가를 물어보고, 국토교통부에서 실거래가를 확인해보면서 춘천에 대해 더 공부했다. 그의 관심사는 서울 밖으로 자꾸만 뻗어나간다.

  그는 언젠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의 여러 꿈 중 하나가 시각장애인 친화적인 부동산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부동산에서는 사회복지시스템과 연계해 장애인이 집을 사려고 할 때 받을 수 있는 여러 지원 정책을 연결해주고, 중개수수료도 할인해줄 것이다. 또 장애인 유형별로 집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들을 파악해서 맞춤형으로 매물을 소개해줄 것이다. 그는 이 꿈의 부동산에 비장애인 직원을 고용해서 장애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교육하고 싶었다. 그의 꿈속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종종걸음이 늘 멈추지 않고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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