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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우 Oct 01. 2024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어려울  때  우리는  힘을  낼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어디선가 읽은 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중도장애인이 된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중도 장애인은 어느 순간까지는 비장애인으로 살아오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일순간에 찾아온 장애로 인한 심리적인 충격과 함께 변화된 신체기능과 삶의 조건을 수용하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만 하는 총체적인 난국에 직면한다고 한다.
    

서른 전후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년 한명씩 잃었다. 그래서 나는  중도장애인이 되어 흔들리며 질주하는 모습으로, 패럴림픽의 여자선수마냥 달팽이처럼 느린 속도로 노선을 벗어나  달려가는 모습으로 있었다.

매 해 한 명 한 명의 가족을 잃을 때 나는 알았다. 수요에는 한계효용의 법칙이 있듯이 불행에는 한계슬픔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큰오빠를 잃었을 때는 세상을 다 잃는 듯 슬프다가, 엄마의 죽음은 상실의 아픔을, 큰언니의 부재는 죽음의 인정을, 친구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느끼는 슬픔도 강도와 모습을 달리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새 중도 장애인이 되어가고 있었고 삶은 비틀거렸다.  두 아이를 키울 때, 남편은 둘째가 태어나기 부터 객지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모든 삶을 오롯이 혼자 비틀거려야 했다. 내 가슴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두 아이를 진행요원삼고 내가 받아온 사랑을 떠 올리며  일을 하고 육아를 하고 공부를 했다. 빨리는 달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달려야 한다는 패림픽의 선수들처럼  지겨운 달리기를 계속하며 결승점으로 향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

    

그러다가

사십 살쯤 되었을 때 난 다시 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행복도 했다. 슬픔도 많이 무디어 갔고 아이들도 아무 탈 없이 잘 자랐고 남편은 성실했다. 살림도 그럭저럭 불어나 오십쯤 되면 큰 부자는 아니어도 꽤 잘 살 것이라는 착각도 했다.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죄스러웠다.     

그러다가 다리가 아파왔다. 디스크였다. 자꾸 심해지면서 나는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수술대에 올랐다. 그러고 나서 통증도 많이 사라졌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나는 잔통이 계속 남아 있었는데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를 고통의 소용돌이 속으로 쳐 박아 넣었다. 나는 행복해서는 안 되는 사람, 불행해야 할 종속이라 늘 불행과 통증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러면서 하던 일도 모두 그만두고 두문불출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을 때는 늦었다.

집은 청소를 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고, 아이들은 갈아입을 옷조차도 없었다.

등교하는 아이를 엘리베이터 앞까지도 배웅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안방과 현관은 멀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았지만 살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는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듯했고 이불 밖은 위험했다.

하루는 초등학생인 작은 애가 와서 화를 냈다. 갈아입을 팬티가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가끔씩 아픈 나를 위해 노래와 춤도 춰주었다.


남편의 권유로 병원을 다니면서 집안의 구역을 정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가까이 있는 세이브존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오면서, 나는  내가  받았던  사랑을  떠  올렸다. 또 그  사랑을  내  아이에게  전해야  한다고  맘을  가다듬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몹시 다정한 분이셨고,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내신 적이 없어셨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는 성미가 불같아서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무서웠다.


 어느 날, 엄마가 동구 밖까지 나오셔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린 나를 안아주시고 가방을 받아주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옆 짝이 구구단을 못 외우면 같이 남아서 구구단 외우기를 도와주라고 하셔서 하교가 늦어진 것 이었다.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셨는데 작은 나를 안고 손이 차갑다며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감싸고 아궁이에 불을 쬐 주셨다. 그 때의 따스함이 내 몸과 맘에 스며들어 꽃샘추위의 내 몸을 감싸주었다. 그 때의 따스함이 평생을 내 몸과 맘에 스며들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야간자율 학습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말았다. 발을 심하게 삐어서 학교에 등하교가 몹시 곤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경운기로 나를 등하교 시켜 주셨다.

신작로를 지나 한우물 숲을 지나 학교까지 다닐 때면 난 자동차를  탄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탈탈거리는 경운기의 승차감도 너무 좋았다. 한우물 숲의 소나무도 내게 다정하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쌀포대도 깔아주셨다.     

그러면서  자고  있을 때는  다  큰 나의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우울증으로 쇠하고  있을  때   엄마와 아버지의 희미하게 전해오는 사랑으로 다시 힘을 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내가  받은 사랑만큼은 주고  싶었다.

 비롯  부모님이  원망스럽고  못난  부분이 있을 지라도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받았던  단  하나만의  사랑의  손짓이나 ,  등을  쓰다듬던   따뜻한  손길이라도 붙잡고  살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았다 . 나는  무엇으로 살아나가는가.  그분들의  따뜻했던 손길로 그 힘으로 다시 아이들을 돌봤다. 그리고 부모님께 받았던  소소한 사랑을  겨워내  온전히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 주었다. 

사십 그러면서  가을이 가고,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

 신기하게  나는 다시 옛모습의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이들을 돌보고 공부를 하고 일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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