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의식도 변화한다
"내가 거기까지 갈려면 1시간이나 걸립니다"(자막)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달려간다.(화면)
이 장면은 일본 판 리틀포레스트의 여름과 가을 편의 첫 장면이다. 이 영화의 배경지는 일본 도호쿠 지방의 코모리마을로 주인공 이치코가 상점이나 슈퍼있는 시내까지 가는데 자전거로 1시간 이상 걸리는 숲 속 마을이다.
코모리마을은 1980년대 우리나라 시골 마을과도 닮아 보였다. 그 중에서 문경에 있는 우리 시댁 마을 : *동무지도 별 변화가 없어 코모리마을과 비슷하다. 코모리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이치코는 도시로 나가 살면서 여러가지 실패을 거듭하고 고향에 다시 돌아와 자급자족하면서 제철이 주는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
엄마와의 추억이 어린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은 보는 것 만으로 힐링이 되었다.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 우리 나라에서도 김태리를 주인공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몇 년 전에 보고 우연히 며칠 전에 또 보았다.
그런데 저번 주, 주말 *동무지 마을에 있는 시댁에 갔다 왔다. 아버님이 우리에게 물러주신 밭에 가서 나는 고구마를 캐고 남편과 어머니는 들깨를 베었다. 누렇게 익은 들깨를 벨 때 마다 들깨 향이 온 밭을 고소한 향기로 채웠다. 고소한 향기를 맡고 자란 고구마 순은 어느 곳보다 실하고 맛있는 고구마를 땅 속에 숨기고 있었고, 나는 그 고구마를 캐며 흙냄새를 맡았다.
가을 하늘은 푸르고, 밭은 금방 베어낸 들깨 단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일을 마치고 어머니가 근처 소변을 보러 가시다가 *꿀밤 나무 아래서 꿀밤을 발견하셨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라 떨어진 꿀밤이 그대로 있었다. 굵고 탐스러운 꿀밤들이 나를 기다린 듯 낙엽 위에 살포시 앉아 있었다 . 커다란 꿀밤 나무 아래서 어머니와 나는 즐겁게 꿀밤을 주웠는데 금방 3되나 주웠다. 주우면서 어머니께 "어머니 이거 제가 다 주워가면 다람쥐는 어쩌죠?"하니 "요즈음은 산에 밤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어서 깔려있다. 게네들 먹을 거 없을까 봐." 하셨다.
갑자기 그 말에 작년에 땅콩 농사에 너구리가 자꾸 파가서 너구리한테 빼앗길까 봐 설 익은 땅콩을 캐왔다는 어머니의 욕심에 피식 웃었다.
나는 다람쥐의 양식을 도둑질 한다는 죄 의식에서 어머니께 면죄부를 부여 받고 열심히 꿀밤에 집중했다. 왠지 어제 3장의 로또를 샀는데 그 기운이 도토리를 만나는데 다 써버린 것 같아 살짝 아쉬웠다.
산에서 잡아다 놓은 꿀밤을 시골 집에 가져와서 보니 갑자기 꿀밤 묵이 만들고 싶어졌다. 나는 꿀밤을 깨끗이 씻어서 자동차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서 꿀밤을 갈아왔다. 시집 온 첫해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묵이 너무 맛있어서 아직도 못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너무 연세가 드셔서 묵을 안 만드시니 내가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방앗간에서 꿀밤을 갈고 옆에 있는 천 가게에서 천을 떠서 수선 집에서 자루를 만들어 왔다.
집에 돌아와서 피곤해서 자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서둘러 앙금을 걸러야 된다고 보채셔서 어쩔 수 없이 꿀밤 가루를 자루에 넣고 앙금 물을 걸러냈다. 몇 번에 걸쳐 꿀밤 물을 걸러내면서 하품을 참았다. 걸러낸 꿀밤 물을 하룻밤 동안 우려냈다.
다음날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퍼 큰 솥에 도토리 우려낸 물이 솥 가운데까지 끓어 오를 때까지 저어 주었다. 가운데까지 끓자 10분 정도 뚜껑을 덮어 두었다가 두부 만드는 판에 묵 물을 부어 두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니 알맞게 굳어서 탱글탱글해졌다.
먹어보니 좀 떫은 맛이 있어서 아쉬웠다. 아마 며칠 간 우려내야 되는데 바로 부산 집으로 돌아가야 돼서 우려내는 시간이 짧았던 것 같았다. 아쉬운 대로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 점심상에 내 놓았는데 의외로 남편과 아주버님이 너무 맛있다고 엄지 척을 해주셔서 우쭐해졌다.
그날 만든 묵은 떫은 맛을 빼려고 부산 우리 집 베란다에서 물에 담긴 채로 작년에 취직해서 객지 나가 있는 우리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동무지 마을 : 경북 문경시 영순면에 위치
*꿀밤 나무 : 도토리 나무의 방언
예)동요 : 커다란 꿀밤 나무 아래서 그대하고 나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