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x편’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어쩌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잔인한 가정사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브런치를 지인에게 오픈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20대의 멘탈을 뒤흔들었던 가정사를 단지 팩트 중심으로 건조하게만 나열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에세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느꼈던 감정을 최대한 주관적 입장에서 말해보려 한다. 감정에 치우칠 수 있다는 글이라는 것을 미리 양해 구한다.
가압류 해제 사건이 있고 난 후 우리 가족은 한 동안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아니, 어쩌면 조용한 척 한 것일 수도 있다. 각자가 마주친 삶에 최대치의 노력을 기울여 애써 무소식을 재생하고 있을 뿐, 분명 내면들은 순탄치 않았으리라. 나는 한 학기에 자격증을 3개나 준비할 정도로 바쁜 삶을 보냈고 와중에도 두 개의 알바를 병행하며 생활비를 마련해 갔다. 방학 중엔 인턴과 함께 또 다른 금융자격증을 준비하고 무참히 깨져보기도 하는 등 좌절의 단계를 차근 차근 밞아 나갔다.
이 사이 아버지는 본인이 원하는 새 집을 지으셨다. 우리 가족은 모두 한 번씩(셋째 누나를 제외하고는) 집에 다녀와 축하해 주며 아버지의 외로움을 덜어주려 노력했다. 나 또한 이전에 느꼈던 배신감이 많이 누그러져 누나들처럼 평범하게 아빠를 대했다. 새 집은 확실히 좋았다. 말해 무엇 할까? 나는 이게 정녕 우리 가족의 기둥을 뿌리 뽑으려 했던 원흉의 흉상이었단 말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엄마와 헤어짐을 선택함으로써 얻은 이 집에서 어쨌든 아버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쉽진 않더라도 이 집을 계기로 남은 인생 2막에 다시 한 번 빛이 되길 자식으로서 진실 되게 응원했다.
목표 뒤엔 황량한 공허함만 짙게 베이는 걸까? 새 집의 효과는 오래 가지 못한 것 같았다. 아빠는 예전보다 더 술을 마시고 가족에게 외로움을 호소하는 전화가 빈번해졌다. 목소리는 더욱 더 서글펐고 사이사이 스며드는 잔인한 폭언은 때론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벅찼다. 반복되는 취중전화는 내가 느낀 배신감을 증폭시켰다. 나는 위로와 분노가 뒤섞인 감정으로 아빠를 강하게 몰아세우기도, 때론 말 없이 그냥 받아주며 감정의 배출구 역할이 되었다. 가슴 아픈 건 술을 마시지 않는 아버지는 다시 성실한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아니, 지친 기색을 자식에게 내비치지 않는다. 우리 남매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시간 날 때 아빠 집에 들려 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나 역시 자주는 못 가더라도 누나들이 간다하면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성실한 사람으로서 아버지가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원동력을 심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남매가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좀처럼 낮술을 하지 않는 아버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낮술 빈도가 늘어만 갔다. 술을 마신 아버지의 폭언 수위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는 퇴직을 한 직후였고 아버지에게 무직은 '쉼'이 아닌 또 다른 '선고'의 의미로 받아들여 졌던 것 같다. 문득 아빠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쎄한 기분이 들어 이번 주말에는 나 혼자라도 아버지를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주말이 되어 찾아간 집에서 아빠와 함께 토요일 날을 맞이했다. 여느 때처럼 술을 집어 드시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낮섦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술 친구라도 되어주자라는 생각에 말리지 않고 같이 마시기로 했다. 한 두 잔을 오가며 아빠를 위로하는데 아빠가 무거운 주제를 언급하며 당신의 살아온 삶을 비관하셨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꺼냈지만 나는 끝끝내 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고(도와줄 수 없기에) 아빠를 다그쳤다. 그러자 아빠는 체념한 듯 또 다시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셨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잠시 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화장실에 간 아버지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곳엔 목을 매다 풀린, 끈에 떨어진 남자가 자기 몸도 못 가눈 채 일어서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한 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아빠의 모습만 바라봤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현장을 응시하며 이내 정신이 든 나는 아빠 곁에 다가갔다. 아빠는 기꺼이 내 도움을 받아 안방으로 가더니 곧 이어 잠을 청했다.
정말로 아니러니한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꿈이 실현된 공간에서 파국적 결말을 보이는 행동을 취했다. 머릿속이 텅 비워졌다. 내가 지금 무슨 사건을 겪은 것인가 곱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워 있는 아빠를 바라보며 다시 돌아와 혼자서 여러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주문을 외쳤다.
"취해야 한다! 취해야 한다!"
잠에서 깬 나는 평상시처럼 일어나 아빠를 맞았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어느덧 가야할 시간이 되지 아버지는 나를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셨다. 차에서 내리며 나는 아빠에게 자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꼭 한 번 안아드렸다. 이 날 맡은 아버지의 기름 냄새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내 삶에서 딱 하루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그 날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