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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옹 May 05. 2024

공부에 붙잡히는 마음

은퇴했으니 이제 공부에서 벗어났구나 싶어 안도하다가도 어쩔 수 없이 다시 공부에 마음이 붙잡힐 때가 있다. 스마트폰 조작이 잘 안돼 아들 녀석에 손을 빌렸더니 툴툴대는 반응으로 돌아올 때가 그렇고, 배고픈데 아내가 먹을거리를 해주지 않고 유세 부릴 때가 그렇다. 그 순간만큼은 스마트폰의 모든 기능을 습득해 아들 앞에서 보란 듯이 사용하고 싶고, 요리 공부를 해 아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다.

     

또 있다. 독서하거나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을 읽을 때다. 읽다 보면 새로운 인식이 생기기도 하고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어선지 마치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때는 주눅 들거나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기분이 마냥 좋다.

      

좁은 뜻에서 보면 공부는 목적이 뭐든 - 대학 입학이든, 자격증 획득이든 아니면 입사든 -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하는 지식 습득의 노력을 말하는 것일 테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 공부를 무던히도 싫어했다. 1학년 때는 전교 꼴찌를 거의 해낼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대학 입학에 그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해내고 그것도 성이 안 차 늦깎이로 유학까지 가서 공부를 계속한 건 지금 생각해 봐도 아이러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를 넘어 좀 더 넓게 보면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 공부 아닌 게 있나 싶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시공간적 행위는 인식과 생각을 낳고 경험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일을 하면서, 심지어 놀면서, 아니 한 떨기 꽃이나 지는 낙엽 하나를 보면서도 갖가지 생각과 느낌이 떠오르고 마음에 들어와 앉는 걸 보면 공부 아닌 게 없다. 신영복 선생이 공부를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 양식’이라 표현한 것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행위에서 파생하는 인식과 경험을 공부라고 보면 책 읽기는 강력한 공부 방식임이 틀림없다. 책은 간접 경험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가 학교 공부를 싫어했을 뿐 유달리 책 읽기를 좋아한 걸 보면 진정 공부를 싫어했던 건 아닌 듯싶어 뒤늦게 위안이 된다. 



ⓒ 정승주


           

나는 여전히 책이 좋다. 책을 읽으면 새로운 생각들이 떠올라서 좋고 모르는 걸 알아서 좋다. 누구는 골치 아파 싫다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곱씹다 보면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어 좋다. 그래서였는지 젊었을 때는 발견한 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애꿎은 친구들만 붙잡고 논쟁하곤 했었다.

     

이제는 늙어서일까. 책을 읽더라도 새로운 걸 발견하는 빈도가 떨어짐을 느낀다. 여전히 책을 가까이하지만 치열하게 읽어내지는 못한다. 공부 마음이 작아지고 있다는 신호다. 과거의 경험과 체득한 인식만으로 살고 싶은 징후다. 공부가 적어지면 생각도 적어질 터이니 경계할 일이다. 생각하기를 멈추면 죽은 거나 다름없어서다.

      

살아내는 매 순간이 공부긴 하지만 되새김질 없는 공부는 공부라 할 수 없다. 진정한 공부는 관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점이나 태도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는 어렵고 힘들다. 삶이 고해(苦海)인데 사는 내내 일어나는 공부가 어찌 고통이 아닐 수 있으랴. 신영복 선생이 공부를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 양식’이라면서도 한편으로 ‘고행(苦行)의 총화’라 일컬은 까닭이다.

      

어찌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상책(上策). 공부의 바다에 풍덩 빠져 제대로 즐기는 게 현명한 태도다. 공부의 고통 한켠에 있는 즐거움, 평안 그리고 충만함을 위안 삼으면서. 

    

이원석은 자신의 책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공부는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다지고 삶을 벼리며 우정을 도모하는 것”(한기호 지음, 「마흔 이후, 인생길」, 102쪽)이라 했단다. 아내가 EBS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Great Minds)≫을 보고 있다. 오늘 강의는 폴 로머 교수의 <진보의 경제학>이다. 어깨너머로 보니 흥미롭다. 공부가 된다. 뒤질세라 나도 얼른 동참했다. 존재를 다지고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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