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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옹 May 27. 2024

계면쩍지만 행복한 둘레길 걷기 동행

보름 전부터 아내는 뜬금없이 가까운 지인과 함께 고봉산(고양시 일산 소재)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인으로서는 이미 5년도 넘게 매일 걷고 있던 운동코스인데, 아내가 뒤늦게 동참한 것이었다. 첫 걷기를 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내게 침이 마르도록 둘레길 칭찬을 늘어놓았다. 표정에서 최적의 운동코스를 발견했다는 기쁨에 마음이 한껏 들떠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내 표현으로 고봉산 둘레길은 가파르지 않으면서 평탄하지도 않은 데다 꼬불꼬불까지 해 지루할 틈이 없단다. 숲길이라 공기가 좋아선지 1시간 반을 걷고 나면 몸이 개운하고 침침한 눈마저 시원해진단다. 무엇보다 걷기를 한 날에는 밤에 잠이 잘 와서 너무 좋다 했다.

      

사실 아내는 손발 저림과 불면으로 고생하고 있어 그동안 맨발 걷기에 열심을 냈었다. 더 좋은 운동코스를 찾아냈으니 그럴만하다 싶었다. 이후 아내는 이틀에 한 번꼴로 걸었다. 이제 맨발 걷기는 마음에서 멀리 떠난 듯 보였다.

      

아내가 스스로 맞는 운동을 찾아서 하는 통에 나로서는 운동할 기회가 더욱 줄어들었다. 걱정되었는지 아내는 내게 지인과 하는 둘레길 걷기에 같이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내심 건강이 염려되기도 해서 동행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인분들이 모두 여성인지라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니 아내는 걱정을 붙들어 매라 했다. 그 말에 용기가 나 한 번 해보겠다 했다.

     

첫 동행 날 아침, 나는 아내를 따라 아파트 현관 앞 주차장으로 쭈뼛쭈뼛 내려갔다. 두 분이었다. 지인들께 가볍게 인사하고 한 분이 손수 운전해 온 조그마한 소형차 귀퉁이에 몸을 실었다. 여자 셋에 남자 하나. 지레 겁먹어(?) 분위기라도 조금 바꾸려는 마음에 헛웃음 짓게 하는 농담 몇 개를 던지는 것으로 동행을 시작했다. 

     

10여 분 남짓 타고 가니 둘레길 근처에 도착했다. 주택단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오다 어느 빌라 건물의 현관 화단에 예쁘게 핀 꽃을 보고 지인과 아내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무슨 꽃이지?’, ‘향이 좋네’, ‘자스민꽃 같네’하며 짧지만 제법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남자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새로웠다?!)



ⓒ 정승주


      

둘레길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숲길이 나타났다. 오르막으로 시작하는가 싶더니 평탄한 길로 이어지다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했다. 솔잎으로 깔린 폭신한 길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나무뿌리가 드러나거나 돌부리가 많은 구간도 제법 있었다. 한참을 가니 갑자기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왔다. 앞에서 인도하는 지인은 도로를 거리낌 없이 가로질러 숲속 길로 다시 끌고 갔다. 산길인지 숲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갈래 길이 많아 한두 번 동행만으로 괜스레 객기부려 혼자 걷다가는 헤맬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길을 기억하려 애쓰다 어느 순간 포기했다. 

    

한참을 걸었다는 느낌인데 겨우 30분이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코스였다. 아내가 요 며칠 열심히 따라다닌 이유가 가늠되었다. 벤치가 있는 중간 지점에 다다르니 다들 먹을 걸 하나씩 내놓았다. 조각 수박, 삶은 달걀, 블루베리 주스였다. 종류별로 맛볼 수 있어 좋았다. (물, 캔맥주, 초콜릿을 먹는 남자들과 사뭇 달랐다?!

    

걸어오면서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가 휴식 시간에도 계속되었다. 모두 살아가는 생활 속 이야기였다. 삶의 지혜가 과일즙처럼 흘러나왔다. (일 아니면 정치 이야기, 그도 아니면 골프 이야기로 지새는 남자들과 달랐다?!)


일어나 다시 걷다 또 한 번의 휴식을 취하고 나니 이제 마지막 내리막길이 나왔다. 꼬불꼬불한 내리막길은 나를 저절로 겸손하게 만들었다. 조심 또 조심하며 내려오니 둘레길이 끝났다.

     

복잡다단한 코스를 걸어보니 둘레길 속에서도 인생이 보이는 듯했다. 가파르고 힘든 구간과 완만하고 평탄한 구간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것이 그랬다. 길을 함께 하며 끊임없이 서로 배려하고, 공감해 주며, 즐거워하는, 지인과 아내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감사와 지혜가 넘쳤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발견이었다. 계면쩍게 시작한 것이지만 행복한 둘레길 걷기를 맛보게 해준 아내의 지인이 고맙기 그지없다. 한두 번만 같이하다 독립하려 했는데, 염치없이 당분간 동행을 계속해야지 싶다. 설마 쫓겨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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