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이용하는 수영장 샤워실의 한 쪽에는 고정형 샤워기가 아닌 핸디형 샤워기 한 대가 있다.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들이 앉아서 씻는 용도로 애용하시며 그들 간에는 종종 이 자리를 얻기 위한 눈치싸움도 이뤄진다. 어느 날인가 한 초등학생이 이 핸디형 샤워기를 사용하기 위해 그 앞에 섰다. 그러나 그 학생 뒤를 따라 들어온 어르신 한 분께서 학생에게 잠깐 써도 되겠냐는 양해의 말없이 다짜고짜 그 샤워기를 자기 앞으로 끌어다가 쓰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당황한 것은 그 학생과 나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점심시간에 들른 식당 가격표에 소인 7,000원 대인 13.000원이라 쓰여있던 것이 뇌리에 스쳤다. 식당 가격표에 기재된 것처럼 어린이를 어른의 절반쯤 되는 존재로 여기는 이런 현상들은 생활 곳곳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을 보고 있으면 어른들의 세상 속에는 작고, 어리기에 함부로 해도 되거나 반대로 모든 것을 어른이 통제'해줘야'하는 존재로서 대상화된 어린이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른 중심적인 이 폭력적인 애정의 표현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은 멋대로 '동심'이라 이름 붙여진다. 동심이라는 단어 속에는 어린이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른의 무의식이 담지 되어 있는 것만 같다. 어린이의 마음은 이러해야만 한다고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쓰리다. 여전히 어른들은 어린이를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비롯된 수많은 일들을 모른 척하며 눈을 질끈 감는다. 아이가 부모 중 누구를 닮았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가장 작은 사회인 가정 내 분위기만 보아도 그렇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얻은 것, 타고난 것과, 후에 얻게 된 것, 인식했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간 경험이 한곳에 섞인 존재들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른의 부족한 상상력에 아이들을 가둔 채, 어린이들에 대한 기대와 걱정 모두에 어른의 시선을 투영한다. 이들은 자신들도 '요즘 것들'이라 비난받으며 자랐지만 모두들 이런저런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잊은 것 같다.
평일 오후 4시의 수영장. 늘 내 시선을 앗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어린이 수영교실의 어린이들이다. 평일 오후의 수영은 바로 이 요즘 것들과 함께 헤엄치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이 '요즘 것들'이라는 말이 자신이 가지고 있다 착각하는 세상을 뒤흔드는 존재에 대한 분노와 시기심이 담긴 말처럼 들린다. 이 단어로 자신들을 어른이라 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상상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을 뭉뚱그린다. 나는 이렇게 뭉뚱그려왔던 내 상상력을 가까운 어린이들을 지켜보는 일들로 조금씩 다려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아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내가 아이로 존재했던 시기보다 나아진 세상 속에 살게 될 이 존재들을 무한히 시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바라기 시작했다. 이 존재들에게 '라떼 이야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손사래 쳐지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
오후 4시의 수영장에는 어김없이 수영을 배우는 어린이들이 낸 물보라가 인다. 내가 지켜본 어린이들은 늘 열심히다. 열심히 놀고, 열심히 말하고, 열심히 먹는다. 서툴지언정 자신이 주도하는 모든 일에 몰두한다. 나와 마주치면 항상 슬쩍 웃는 아이가 오늘 25m 자유형을 완주했다. 얼마 전까지 반쯤 가다 고개를 들곤 하더니, 몇 주 사이 부쩍 실력이 늘었나 보다. 칭찬해 달라는 듯 씩 웃으며 레인 끝에 서있는 나를 쳐다보는 아이에게 기특해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확신할 수 없지만, 들키지 않았길 바란다) 무심하게 엄지를 보낸다. 상업화된 환대에 익숙할 요즘 것들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것이 두려운 나는, 이렇게 최대의 마음을 최소한에 것에 담아 보내는 것으로 무한히 확장되어가 갈 그들의 세계에 작은 포석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