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새벽. 눈을 떠 뽀드득하게 잘 마른 변기에 엉덩이를 얹는다. 하루의 마지막 일정인 지난밤의 변기 소독을 눈을 감고 경건히 떠올린다. 화장실의 창문을 활짝 연 후, 미지근한 물로 불린 변기에 거품 타입의 락스를 뿌린다. 하루치의 지리멸렬함을 변기와 함께 소독한다. 이 의식 이후의 시간은 배설의 욕구를 가진 존재 이상의 것이 되어 향유한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가는 물과 함께 지난밤의 유유자적했던 시간은 함께 흘려보낸다. 이제는 땅에 발을 붙일 시간.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간단한 정돈을 마친 후 크고 작은 가족들을 배웅한다. 기계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이 단계들을 거쳐 출근을 했을 무렵 손끝에서 희미한 락스 향이 느껴진다. 어디서 묻은 것일까? 락스를 넣어 통세척을 마친 세탁조에서? 지난밤 변기로 락스를 소독할 때? 아, 양치를 하다 눈에 띈 줄눈의 핑크빛 물때를 참을 수 없어 칫솔을 입에 문 채로 락스를 뿌려 솔질을 했었지. 장갑을 꼈는데, 구멍이 났었나? 이어지는 생각의 종착점은 '나는 왜 이렇게 락스에 집착하는가?'이다.
내 인생에서 최초의 락스와 관련된 기억은 6살 무렵 가족과 함께 떠난 부곡하와이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가족과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나는 여전히 '부곡하와이'라는 단 다섯 글자만으로도 그 시절 실내 수영장의 높은 습도와 짙은 락스 냄새를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는 향으로 여행을 기억하기 위해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향수를 산다고 한다. 이렇듯 내게 락스는 그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향수가 되기도 한다. 단란했던 가족의 한때를. 젊고 태산 같던 부모님과의 시간들을. 이따가 부모님께 안부 전화드려야지. 자자, 이만 정신 차리자. 커피 머신을 예열해 한 잔의 커피를 내린다. 밤사이 밀물처럼 밀려온 업무 연락에 답하고 오늘 일과 중으로 끝내야 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맞춰 정리한다. 급한 일을 마무리 지은 후, 업무에 밀린 채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댄다. 따끈하게 프린트된 인쇄물과 식은 커피를 양손에 쥐고 '사는 데 필요한 일'을 해 나간다. 삶이라는 정글을 헤쳐나가는 정글 칼 같은 식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하루를 쳐내고. 또 한 잔 마시고 또 하루를 쳐낸다. 정신 차리자. 지금은 안돼, 자기 연민 따위 밤에 변기 소독 끝내고 해라, 나 자신아!
잔을 쥔 손끝에서 또다시 희미한 락스향이 느껴진다. '내 주식 잘 오르고 있나?'로 의식이 가닿는다. 희미한 락스향을 맡고 떠올린 내 주식은 유한양행. 과감하게 투자를 하게 된 이유 또한 아묻따 '락스'다. '저세상 성능의 청소용품을 만드는 회사가 일류가 못 될 것이 없다'는 돌아버린 판단력으로 재산의 일부를 투자했다는 말에 지인들은 내 정신의 안부를 묻는다. 뭐 어떤가. 코카콜라 중독자인 워런 버핏도 코카콜라의 대주주가 아닌가. 이토록 귀납적으로 완벽한 논리를 가진 투자라니.
다 못 찬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모랫길을 달려 하원 차량을 향해 뛰어가기 전, 내게는 하루 일과의 클라이맥스가 남아 있다. 바로 수영하는 시간. 퇴근 후 찾은 수영장은 락스 중독자인 나의 인생에 하루치 쉼표를 찍는 장소다. 염소향을 가득 머금은 채로 잘 마른 수영복과 수모, 세안 도구를 꺼내어 입구로 향한다. 그 후 한 시간가량 유영한다. 락스프레소 투 샷으로 뇌를 씻어내는 무아지경, 물(水)아일체의 시간.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내 삶에 소중한 것들을 죄다 락스 물에 담가 씻고 싶다.
여기서 잠깐, 이 ‘염소향’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락스 냄새'는 무균 무취의 락스와 유기물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성분인 클로라민이라는 성분의 냄새다. 유기물이 사멸하며 발생하는 이 성분의 냄새를 나는 기이하게도 애정 어린 것들과 연관 짓는다. 멸균과 박멸을 애정하는 내가 락스에 버금가는 애정을 주는 것도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75% 주정(에탄올)이다. 남들은 판을 깔아두고 즐겁게 마시는 그것을 나는 이곳저곳을 닦아가며 즐겁게 킁킁거린다. 이 두 용액을 가진 나는 어떤 얼룩과 곰팡이도 두렵지 않다. 반기를 들며 자라나는 그들을 아주 박박 문지르다 말고 멈칫한다. "싹 다 잡아들여"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그의 입장에서 국민은 불편하게 시선을 채가는 핑크빛 물때나 얼룩과 같았던 것이었구나. 그러니 그의 방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얼룩 같은 국민들을 '멸균'시키려 했던 것이었구나. 한 큐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입장이 이해되어버렸다. 에라이. 욕지거리가 앞니까지 튀어나온다. 갑자기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다. 이럴 때는 락스 청소가 시급하다. 오라, 짙은 사멸의 향이여!
+ 락스 사용 시 반드시 차가운 물과 함께 사용하셔야 합니다. 또한 충분한 환기와 마스크, 장갑은 필수입니다.
동의할 수 없으나, 지나친 청소는 오만(대충 오만가지라는 뜻) 건강에 해롭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