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숨 가쁘게 수영을 하다 보면 어딘에 선가 비릿한 눈길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면 여지없이 눈을 피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과 불편한 조우를 하게 된다. 이런 눈빛이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은 내게 뛰어난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가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아도 되는 사람'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많은 영역에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이렇듯 생활의 곳곳에서 구시대적 기준으로 타인의 외모와 자질을 재단하는 행동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그 판단에 유예를 두지 않고 외부로 표출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우위를 스스로 확정 지어 간다. 이렇게 남을 결정짓고, 판단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입에 담는 사람들 특유의 눈빛과 표정들은 수없이 조우해왔다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주칠 때마다 기분 나쁜 경험의 첫 기억처럼 다가온다. 이제껏 그들과 엮이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로해져서 슬그머니 장소를 피하거나 눈을 돌려버린 일들이 떠오른다. 그 순간 내 속에서 '언제까지 눈길을 회피하는 것으로 당위를 뺏기기만 할 것인가?'라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물속으로 숨어들어도 이 목소리는 내 머릿속을 맴돈다. 누런 빛깔의 눈길은 피해도 내 속에서 비어져 나온 이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인간은 태어나며 생물학적인 성(Sex)을 가진다. 그것은 불변의 명제라 여기며 살던 시대가 이어져 왔고 지금도 그 명제는 법의 틀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성이란 외부에서 결정짓는 것이 아닌 내가 나를 어떻게 전제하느냐에 따라, 적어도 자신 안에서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가 가진 태초의 전제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결정한 생의 전제에 발을 붙이고 사는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수많은 관념과 전통의 외압에도 오늘날에 자신을 결정짓는 일은 오로지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기는 사람인 척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뒤이어 끈적한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순간을 모면하려 했던 자신이 떠오르자 문득 귓불이 붉어진다. 나는 나를 무엇이라 여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도 때때로 수영장에서 수취인이 불분명한 비릿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눈을 직시한다. 마치 '네가 보낸 그 눈길 내가 받고 있다' 알려주기라도 하듯. 그들이 속으로 내리는 어떤 평가도 모른 척하면 그만이라 여기며 눈길을 피했던 나를 어제에 못 박아 버렸다. 그리곤 내 두 눈에 차마 입에는 담지 못할 말들을 내비친다. "뭘 쳐다보냐, 이 씨발 새끼야." 이때 내 전 재산을 들고 튄 사람을 보듯 최대한 인류애를 거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킥 포인트다. 내 경험상 높은 확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끈적한 눈길을 거두어 갔다. 그러니 더러운 걸 피해 가자는 마음으로 지분거리는 눈길들을 피하기 전에 또렷한 눈동자로 그 눈길에 맞서 보자. 지나친 뻔뻔함이 도리어 날 세워 올 때면, "제가 눈이 나빠서요. 빤히 쳐다봐서 놀라셨겠네요. 하~도 빤히 보시길래 아는 사람인가 했네요." 하며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들이 아무렇게나 쳐다보아도 되는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이 눈싸움으로 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활로를 가지게 될 것이니, 밑져야 본전. 빤히 쳐다보며 눈싸움을 걸어올 때는 이에 기꺼이 응하는 것으로 대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