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 힘든 허니문 속에서도 우리의 별은 찾아왔다.
진실 씨의 결혼은 어느 집안이나 모두 비슷하게 축제 분위기에서 모든 일정이 진행되지만 특별하게도 진실 씨네 집에서는 뭔가 남다르고 미묘한 더 행복하고 즐거운 감동들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졌다.
진실 씨 아버님은 형제들이 삼 남매이지만 형님은 여기저기 떠돌다 지병이 생겨 어린 조카들만 여기저기 남겨 둔 채 40 중반에 세상을 떠나셨고, 누나 또한 부모님들께서 일찍 돌아 가시는 바람에 일찍 결혼을 했으나 6.25를 겪으면서 쓰라린 아픔만 안은 채 근거리에 살고는 있었으나 진실 씨 아버님께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도와줘야 하는 상황 인지라, 진실 씨 아버님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립해서 앞길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보통의 친구들보다 6~7년 아니 8~9여 년이나 늦은 나이에 그것도 겨우 결혼을 하게 되었고, 친구들은 모두 학부모가 되어 있는 나이인 3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말하기 좋아하는 동네 노인네들은 "이 늦은 나이에 장가가서 회갑 전에 아들 녀석 장가는 볼 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면서 험담으로 입방아를 찧곤 했다.
진실 씨 부모님들은 제발 첫째가 딸이 아닌 김 씨 집안 대를 이어갈 아들이 태어나기만을 절실하게 바랬고 또 기다린 보람으로 대를 이을 수 있는 진실 씨를 얻게 되었고 이 금쪽같은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엄청난 복덩어리로 조심스럽게 키운 귀한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데 얼마나 즐겁고 행복할 일인가?
진실 씨의 결혼식은 집안 행사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의 잔치이면서 축제로 아주 성대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진실 씨와 사랑 씨 두 사람 또한 별문제 없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혼의 단꿈과 샅바 싸움이 한창인 신혼생활로 열심히 행복하게 즐겁게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조금만 더 하루가 길었으면 좋겠다고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 씨가 아침부터 몸 살 기운이 있다면서 힘들어했다. 마땅히 집에 몸살감기약도 없고 해서 힘들어 하지만 어떻게든 사랑 씨를 부축해서 매일 아침처럼 큰 다리를 건너서 좌석버스를 타고 진실 씨와 함께 출근을 했다. 사랑 씨한테 병원부터 꼭 가라고 손을 흔들며 진실 씨는 마포에서 내리고 사랑 씨는 명동까지 그 버스로 이동을 했다.
명동에 내렸는데 아침보다는 조금은 나아졌으나 어딘가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여자들의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랑 씨는 사무실 근처 일반의원보다는 산부인과를 가서 진찰을 받아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아 진실 씨 한테는 아직 어디 간다는 말도 안 하고 강남에 있는 회원 산부인과로 혼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들의 직감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었다. 정확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3개월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이니까!!! "허니문 베이비"였다. 100일 정도 되었다고 원장님이 축하를 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즐거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 날 우리 아이들은 좀 더 안정된 상황 속에서 편안하게 좋은 집에서 함께 살고 싶었고, 그 준비가 아직은 많이 부족한 상태인데 예상치 않은 기쁜 소식은 바로 "그 힘든 허니문 속에서 우리의 별이 선물처럼 찾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진실 씨나 사랑 씨가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애원도, 미룰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늘이 점지하신 운명이었다. 그것도 행복한 일이었고, 준비가 조금 덜 된 상태에서 그가 예상보다 좀 일찍 두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왔을 뿐이지,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현실은 받아들이고 즐겁고 행복하게 내일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시골에 계시는 진실 씨 부모님들과 통화하는 사랑 씨의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진실 씨 집안에서 흐르는 공기의 온도는 보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전해 질 정도로 부모님들은 좋아하셨다. 이 소식은 진실 씨네뿐만은 아니었다. 아직 작은 오빠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알게 모르게 조심하는 눈치가 있어서 진실 씨네 집안보다는 조금은 낮은 온도의 행복감이었지만 너무나들 좋아하셨다.
사랑 씨네 부모님들은 연세가 좀 있으시다 보니 작은오빠는 오빠 일이고, 막내딸이 남의 집에 시집을 갔으면 그 집안에 맞춰서 할 도리는 빨리 하는 것이 딸을 시집보낸 부모의 입장에서는 굳이 에둘러 밖으로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나름대로의 기다림은 있으셨던 것 같았다.
양가의 무한한 사랑을 독차지하며 두 사람의 허니문베이비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성장해 가고 있었다.
진실 씨와 사랑 씨는 나름의 태명도 지었다. 진실 씨가 대학원을 꼭 다니고 싶었는데 여건 상 그럴 수 없다 보니 아들을 낳으면 꼭 박사까지 공부를 시켜서 대리 만족이라도 해야겠다는 꿈을 품고 있어서 아들 태명을 "김박사, 김박"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딸 또 태어난다면 공주처럼 진짜 예쁘게 공주 원피스만 입혀서 키우고 그 원피스 입고 미소 지으면서 아빠라고 부르면서 달려와 안기는 그러한 예쁜 딸의 모습만을 항상 머릿속에 그리면서 상상하고 있어서 우리 딸만큼은 진짜 공주로 만들어 줘야겠다는 일념으로 아예 태명부터 "공주"라고 부르기로 했다.
진실 씨는 부모님께서 직접적으로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적은 없었지만,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부모님들로부터 느껴지는 집안 분위기나 동네사람들이 수 근데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왔기에 꼭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암묵의 협박 같은 흐름을 지속적으로 느껴 온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성장하면서 보면 집안에 형제들이 8남매 9남매 이처럼 형제들이 많은 집에서는 그런 느낌이나 압박이 전혀 없지만, 혹여 아들이 없이 딸만 줄줄이 있거나 집안 대대로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는 반듯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남아선호 사상이 상당히 강한 지역이 진실 씨네 고향 분위기였다.
그래서 아들이 귀한 집 어르신들이 선배들이 결혼 정년기가 다가오면 하시던 말씀이 무조건 첫아들을 낳아야 다음에 딸이든 아들이든 부담이 없지, 만약 첫째를 딸을 낳는다면 부인은 물론이거니와 남편까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압박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며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첫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비법 아닌 미신 같은 몇 가지의 말들이 전설처럼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남자는 야채보다는 무조건 고기 종류를 많이 먹어야 하고 특히 조개 종류를 많이 먹어야만, 첫째는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 말들이 진실 씨 머릿속에는 어려서부터 세뇌되어 있었다.
진실 씨는 그 정도로 압박을 느끼지는 안았지만 혹시 아들을 못 낳아 사랑 씨와 자기가 받아야 할 눈총을 피해야 하고 아니 무조건 첫째를 아들로 만들어야 둘째 때 좀 편안할 수 있을 것 같아 첫째는 무조건 아들이어야 한다라는 각오로, 누구한테도 말은 하지 안았지만 사회생활 하면서도 조개라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진실 씨는 찾아다니면서 자주 즐겨 먹었다. 이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도 아니고 그냥 구전되어 내려오는 떠도는 애기지만, 그래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 놓고 나서 기다린다는 믿음으로 진실 씨는 오래전부터 의도적으로 혼자만 실천하고 있었다.
임신 중에 사랑 씨는 그래도 큰 입덧은 없었다. 한 동안 밥할 때 나오는 밥 냄새를 맡지 못해 힘들어 하기는 했지만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엉뚱한 과일을 찾거나 구하기 어려운 음식을 먹고 싶다고 진실 씨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사랑 씨가 나름대로 참았는지 아니면 뱃속에 있는 김박이가 효자라서 진실 씨를 편하게 해 준 건지는 몰라도 하여튼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그래도 낳는 순간까지 진실 씨나 사랑 씨나 부담은 안고 살았다. 진실 씨는 가급적이면 사랑 씨한테 남아선호 사상 같은 부담은 주지 않으려고 "당신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은 했지만 속마음은 아들이길 바라고 또 바랬다.
시간은 흘러 다음 해 2월, 진실 씨가 1 공장으로 발령을 받아 첫 출근을 하다가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고 회사를 조퇴한 후 디지털단지역에서 사랑 씨를 만난 이유가, 회사의 갑작스러운 발령에 조금의 불만도 없진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분만 날자가 정해저서 출산을 하기 위해 산부인과에 입원을 하러 가는 사랑 씨와 함께 가기 위해서였다.
사랑 씨는 초산이다 보니 한편으로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겁도 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 씨와 함께 있기에 그쯤은 이겨낼 수 있었다. 거기에다 그 유명한 병원 원장님도 사랑 씨의 불안해함을 잘 알기에 몇 번이나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 사랑 씨를 안정시켜 주셨다.
그분이 운영하는 이 산부인과 병원 또한 당시에 강남에서도 제일 진료를 잘해 유명인들만이 이용한다고 소문이나 있었고...
원장의 인지도야 언론에 워낙 많이 노출되어서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입원실 시설이나 설비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진료 설비는 물론이거니와 각 산모 입원실도 모두가 1인실에 베드는 올 자동으로 높낮이 조절이 다 되는 최신 제품으로 설치되어 있고 입원실 벽지까지도 전부 일본이나 독일에서 직수입해서 인테리어를 했다는데 정말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거기에 있는 의료장비들은 국내에는 없는 최신 설비들로 출산 후 산모들이 엄청 편안해한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부유층들만이 애용하다 보니 병원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진실 씨나 사랑 씨가 다방면으로 병원비를 수소문해 보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리 사랑 씨 회사 회원이 운영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고급병원의 병원비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입원 다음날 아침부터 진실 씨는 물론 사랑 씨 어머님까지 오셔서 출산을 기다리는데, 배는 계속해서 통증이 온다고는 하는데 자궁이 벌어지지 않아서 진통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도 진행 사항에 큰 변동이 없었다. 오후 3시가 넘어 가도 출산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장님이 진실 씨를 불렀다. "이 상태로 계속 있으면 신생아한테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산모도 힘들어하니 제왕절개를 해서 출산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고 결정을 하란다.
진실 씨는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자연출산이 비용은 저렴할 텐데!!!"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나 사랑 씨가 힘들어하고 있고 아기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진 안았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출산은 오후 5시 27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사랑 씨의 고생이야 이루 말로 표현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사랑 씨는 떡두꺼비 같은 3.8kg의 아들을 건강하게 출산해서 진실 씨 품에 안겨 주었다.
진실 씨는 아기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손가락 발가락을 세어 보았다. 그리고는 발가락 생김새가 어떤지였다. 다행히도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은 좌우 5개씩 모두 20개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아주 건강하게 태어나 주었다.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진실 씨가 발가락을 유심히 살펴본 이유는 실은 사랑 씨 발가락 하나가 옆 발가락 위로 올라타 있어서 혹시나 그걸 닮았나 해서 유심히 확인했던 것이다. 특히 남자아이인데 나중에 군대라도 가게 되면 장거리 행군을 하거나 할 때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막 태어난 신생아를 보면서 하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계산적이고 꼼꼼함이 얼마나 많이 준비하면서 기다렸는지를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워했다.
시골에서 농사일로 바쁘셔서 출산 전까지는 올라오시지 못했던 진실 씨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서울로 올라오셨다.
손주를 안아 보신 진실 씨 아버님의 눈에서는 숨기려 애를 쓰시지만 숨길 수 없는 고맙고 반가운 기다림의 눈물이 한동안 멈추질 않았다. "아우 이제야 한숨 놓는다. 진실엄마 이제 우리도 제삿밥은 먹을 수 있겠다" 하시면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신다.
한편 손주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진실 씨의 고향 집에서는 부모님 보다도 진실 씨를 더 아끼고 감싸 주시는 진실 씨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부모님은 계시든 안 계시든 아랑곳없이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 셨다는 후문이 한참 후에 진실 씨와 사랑 씨 귀에까지 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진실 씨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아들도 없이 진실 씨 어머님과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이 두 딸만 믿고 온갖 구진일은 물론 일본으로 강제징용까지 끌려갔다가 딸들을 위해 어렵게 살아서 돌아오셔서 살고 계셨는데, 중간에 좋지 않은 일로 작은 딸을 잃게 되자,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외할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외할머니 혼자서 몇 번이나 좋지 않은 일을 벌리 셨지만, 인간사 목숨을 하늘이 그리 쉽게 받아 주질 안아 몇십 년째 그 고통을 가슴에 품고 살고 계신 분이셨다.
그런 분 앞에 손주인 진실 씨는 이 세상 모든 것이었다. 오로지 진실 씨만을 위해 살고 계셨다. 만에 하나 누구라도 진실 씨와 관련된 일을 일으키거나 험담만 해도 이를 그냥 넘어가시질 않았다. 모든 걸 다 진실 씨 큰 손주만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그런 외할머니 셨다.
태명 김박을 건강하게 출산은 했으나 사랑 씨는 김박에게 젖을 물려 보지도 못했다. 첫 출산이다 보니 처음 수유를 위해서는 젖을 좀 짜내고 먹여야 하는데 젖가슴이 아프다면서 죽는다고 엄살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통증이 있다며 발버둥을 치면서 거부하는 바람에, 김박이는 사랑 씨의 젖을 단 한 번도 물어보지 못하고 분유와 이유식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서 자기 젖은 죽어도 못 준다고 거부하던 사랑 씨는 어디서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김박이 분유만큼은 당시에 제일 좋다는 파스퇴르 분유를 먹여야 한다고 우겨서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분유를 구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일주일 후 퇴원을 해야 하는데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걱정과는 다르게 병원비는 일반 병원 보다도 적게 너무나 적게 청구되었다. 잘못 계산되지 않았나 해서 원무과에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변동이 없었다.
사랑 씨 회원이던 원장이 사랑 씨 사정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원무과에 지시를 해서 사랑 씨나 진실 씨가 자존심 상하지 않게 최소 비용만 받으라고 하셨단다.
두 사람한테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진실 씨 부모님과 사랑 씨 부모님들이 서로 내려고 하시는 바람에 두 사람은 비용 한 푼 들이지 않고 김박이를 무사히 퇴원시킬 수 있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할 뿐이었다.
태명 김박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사랑 씨의 출산휴가도 기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인 진실 씨 혼자 벌어서는 도시 생활이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였한 직장인으로서 당당하게 은행에 손을 벌려서 조금은 깨끗하고 방 2칸짜리 2층 전셋집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과 상의하여 연세는 있으시지만 진실 씨만을 위하는 분이기에 그 손주의 아들이라면 힘드셔도 봐주실 수 있을 것 같아 외할머님을 서울로 모셔서 김박을 당분간 키워 달라고 하기로 했다.
외할머니는 당연히 좋아하셨다. 그러나 아기를 키워 보신 경험이 전무하고 시골에서만 생활하셨던 분이기에 아기 키우는 것 보다도 도시 생활의 답답함을 어떻게 견뎌 내실지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김박 증손주와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김박을 키우시는 일도 너무나 즐거워하셨다. 몇 번이나 힘드시지 않느냐고 진실 씨나 사랑 씨가 여쭤 보았지만, "사랑은 내리사랑 이라더니 그런 것인가?" 손주인 진실 씨 키울 때와는 또 다른 증손주를 키우시는 재미가 남다르게 느껴지시는 모양이었다.
태명 김박으로 이미 불리고 있던 김박은 출생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영원히 운명처럼 붙어 다닐 좋은 이름을 지어 주어야 했다. 시골에 있는 진실 씨 아버님께 말 씀 드렸더니 집안의 돌림자는 알려 주시면서 본인이 작명을 하시겠다고는 하시지만 김박의 미래가 달린 문제라면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눈치를 보이 셨다. 그도 그럴 것이 김박이 태어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 보니 김 씨 집안의 장손이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몇 개를 예비 안으로 주셨는데 두 사람 생각과는 너무나 멀리 동떨어진 촌스럽기 짝이 없는 진실 씨나 사랑 씨 두 사람한테 이거다 할 정도로 딱 와닿는 이름은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하다 사랑 씨 친구 시아버지께서 작명을 잘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의뢰해서 김박에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을 받아서 진실 씨 집에도 사랑 씨 집에도 물어보았더니 양가에서 다 좋은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진실 씨나 사랑 씨도 "지민, 김지민"이 너무 입에 딱 붙고 좋았다. 거기에 태명 김박과도 매치가 잘 되는 좀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루종일 지민이와 둘이서만 집에서 보내던 외할머니는 답답함이 힘드시는지 차가운 겨울 날씨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 무렵이 되면 말귀도 못 알아듣는 지민이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려서 바람 쐬러 나가서 놀자면서 진실 씨나 사랑 씨가 퇴근해서 올 때까지 대림역 과 도림천 둑방 사이의 난간 다리에 앉아서 재롱을 보면서 세 살 때까지 건강하게 잘 키워 주셨다.
시원한 대림역 난간 다리 위에서 놀다가 사랑 씨나 진실 씨가 퇴근해서 지하철 출입구를 나오면서 "지민아!!!" 하면서 부르면 한달음에 알아보고 뛰어가 안기는 지민이의 모습을 보면서 외할머니는 농담 섞인 말씀으로 '지민이 이놈 키워줘 봤자 아무 소용없네!!""엄마 아빠 밖에 모르네!!!" 하시면서 은연중에 서운 해 하시던 모습은...
지민이의 성장 속도는 가속 페달을 밟은 듯, 진실 씨 외할머님의 연세로는 갈수록 감당하기가 힘들어 저 갔다. 두 사람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외할머님의 연세에 커가는 사내아이인 지민이를 감당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고, 거기에 도시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시골생활의 그리움을 지민이만을 생각하면서 여태껏 참고 견뎌왔던 것들이 외할머니 마음속을 하나하나 서서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한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왔는데도 내색은 못 하시고 스스로 꾹꾹 참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큰 불효 하는 것만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평생을 살아오신 고향 시골로 내려가시게 해서, 즐겁고 편안하게 동네분들과 어울리면서 행복하게 사시게 하는 것만이, 오로지 큰 손주 진실 씨 한 사람만을 위해 평생을 보내신 외할머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년 여만에 외할머님을 시골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진실 씨의 발걸음은 참으로 무겁고 텁텁했다. 서울로 모신 것이 편안한 여생을 위한 것이 아닌 증손주를 키워 달라고 모셔와서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마음이 많이 아파왔다.
"빨리 성공해서 할머님 살아 계실 때 무엇으로 든 보답을 드려야 할 텐데!!!" "그때까지 살아 계셔야 할 텐데" 진실 씨와 사랑 씨는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올라왔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러지 않던 지민이가 밤만 되면 깽알거리고 밥도 잘 먹지 않을 려고 하고, 잠도 잘 자지 않고, 자꾸 보채는 것이, 그 어린아이가 외할머님이 내려가신 것을 알아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한 동안을 진실 씨와 사랑 씨는 밤만 되면 지민이를 안고서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면서, 잠이 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처럼 부모들이 힘들게 어렵게 키웠다는 사실을 자식들은(지민) 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