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픔은 더 찐하고 깊은 사랑으로 치유하거나, 어디든 현실과 동떨어진 세월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면 자연스럽게 아물어 간다"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 사이 진실 씨도 대한의 건아답게 군대를 다녀왔고, 이제는 미래를 책임져야 할 장래의 직업을 고민하는 시기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FRESH MAN 시절 삼총사들은 진실 씨가 군대를 일찍 가는 바람에 서로가 복학 시점이 달라져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삼총사에서 각자의 총사로 흩어져 연락마저 끊긴 지 오래되었다. 시골 출신인 진실 씨 주변에는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 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주위에 자문이나 직업에 대한 의견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진실 씨 혼자서 스스로 이론으로 배우고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장래 진로에 대한 고민이 한참 많을 시기인지라, 거리거리마다 풍성하고 하얗게 온 세상을 벚꽃들이 만발해 수놓았었는데 진실 씨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세상 돌아가는 현실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미래 걱정에만 매달려 지내느라 즐거워야 할 대학교 3학년, 3월의 봄날을 허무하게 보내 버렸다.
4월에 접어든 어느 날, 뜬금없이 고향친구 일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실아 너 혹시 4월 18일 저녁에 특별한 약속 있냐?"
"오랜만이다. 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누가 너를 좀 보고 싶다고 한다네!!!"
"나를?"
"너한테 나를 보고 싶다고 할 사람이 누구냐?"
"장난치지 말고 끊어, 짜식아"
하면서 진실 씨는 전화 수화기를 제자리로 내 팽개쳐 버렸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또 일철이었다.
"왜 말하고 있는데 끊어 인마"
"진짜! 4월 18일 날 우리 회사로 와라"
"꼭 와야 한다."
"시간은 오후 5시 야, 기억해라"
이번에는 일철이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진실 씨 생각에는
"이 자식이 장난치나, 주말도 아니고 목요일인데..."
마침 목요일은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일철이 회사는 방배역 근처에 있었고, 거기에서 경리 아가씨 한 명 사장님 등 직원이라고는 단 두 명뿐인 아주 조그만 건축자재 상점으로, 나무 합판이나 목제 등을 판매하는 목제 대리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은 수업도 없는 날이고, 지하철 2호선 한 번만 타면 가는 곳이기에, 약속된 시간보다 좀 일찍 일철이 회사 근처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아직 퇴근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다면서, 시간 되면 자기랑 함께 움직이자고 자기 사무실로 오란다.
처음으로 친구 사무실에 찾아 가는데 음료수라도 몇 병 사서 가져가는 것이 예의인 줄 알면서도, 주머니 사정이 가난한 진실 씨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기에 얼굴에 철면피를 하고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자제를 쌓아 두는 공간인 마당은 널찍하게 있는데 사무실은 조립식 컨테이너로 2층에 있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2층으로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서자, 경리 아가씨 인 듯한 여자분이 진실 씨를 잘 아는 사람처럼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철이가 고향 친구가 대학생이라서 나름대로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뻥을 섞어서 자랑을 늘어놓다 보니, 그 아가씨 왕영미 씨는 처음 보는 진실 씨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진실 씨의 모든 것을 꽤 뚫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 편하고 자연스럽게 행동을 했다.
매일 사장이 외출하고 나면 둘이 앉아서 진실 씨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여자친구 얘기도 자연스럽게 오고 갔고, 진실 씨는 오래전에 아픔이 있은 후로는 여자들을 만나지도 안는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일철 이가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주자고 영미 씨와 의견이 일치되어, 그날 영미 씨 성당 친구인 사랑 씨를 소개해 주기로 둘이서 약속을 잡았던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이 자식이 자기 회사까지 나를 부르고"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고!!!"
"뭐 월급날인가!!!"
"소주나 한잔 하자고 하는 거겠지."
걱정 반 즐거움 반으로 편하게 생각하면서 진실 씨는 아무런 준비 없이 평소에 입던 펑퍼짐한 바지에 허름한 잠바 떼기 하나 걸친 게 다였고, 머리는 장발에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휘어서 하늘을 찌를 듯 뻣처 있는 모습이 마치 상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두 사람이 작당하고 꾸민 일을 알기 전까지는 잠시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진실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랑 씨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영미 씨와 저녁을 먹기 위해 방배동으로 시간 맞춰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진실 씨는 사랑 씨를 소개해 준다는 영미 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일철이가 자기를 회사까지 부른 이유를 알게 되었고. 어떤 준비를,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추한 모습으로 아가씨를 소개받는다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앉아만 있다가 약속 있다고, 핑계 대고 슬기 머니 사라져 버리지 뭐"
"아니, 지금 그냥 아프다고 하고 도망처 버릴까?"
"도망처 버리면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아무것도 모르고 오고 있는 그분한테도 예의가 아닐 것 같고"
보이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서 수많은 상상과 현실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진실 씨는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다.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고 진실 씨는 일철이와 영미 씨 뒤를 쫄랑쫄랑 망아지처럼 따라서 들어선 곳은 방배역 근처, 당시에 그래도 꽤 유명하고 빵값 비싸기로 알려진 제과점이었다.
진실 씨는 쫄랑쫄랑 뒤를 따라가면서 한편으로 생각하기에는 이런 생각도 머리를 스쳐 갔다.
"오늘, 시간도 있는데!!! 한번 만나나 볼까?"
진실 씨는 편하게 편하게 수십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제과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진실 씨가 혼자 마음속으로 편하게 편하게 그렇게 맹세한 다짐은 온 데 간데없고, 무엇이 진실 씨 눈을 멀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방금 함께 들어온 일철이와 영미 씨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무언가가 끼인 것처럼 깜깜한 어둠이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너무 긴장한 탓인가!!! 하여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정신이 없었다.
어렵게 정신을 가다듬고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고 이름을 말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이번에는 가슴이 쿵쾅 부풀어 올라 숨이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자리에 앉아 있다 인사차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사랑 씨의 모습이,
마치 지난 몇 년 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희석시키기 위해 참고 또 참아왔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힘든 기억과 많은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야 겨우 본인의 정 위치에서 삶의 방향키를 움켜쥐고 오로지 목표지점을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었는데...
사랑 씨를 보는 순간 진실 씨의 힘든 시간과 기억은 찰나였고 마음이 한순간에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멀리서도 느껴지는 風光이 첫사랑 수정 씨와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진실 씨가 느끼는 처음 보는 사랑 씨의 모습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 미모 스타일 체형 말하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수정 씨와 비슷하고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다 굳어져 버린 전형적인 도시미인 도시아가씨의 모습 그 자체였다.
진실 씨가 오랫동안 상상해 와서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미래 여자친구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상 속으로만 그려 놓고 간직한 채 상상으로만 그리워하면서 나중에 성공하면 꼭 다시 만나리라 다짐하며 그 아픔의 세월을 인내해 온 "이상형의 여자친구" 그 모든 것 자체였다.
너무나 잘 어울리게 입고 있는 노란색 원피스와 간결하게 다소곳이 빗어 넘긴 짧지 않은 머릿결, 샾에 다녀온 듯한 굵직한 머리 웨이브, 계란형의 작은 얼굴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톤, 큰 눈망울,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한 키 등등 황송하게도 너무나 예뻤다.
시간만 때우고 가려고 했던 진실 씨의 생각이, 바로 후회로 돌아 섰다.
일철이가 썰렁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자, 서로 통성명부터 합시다!!!"
"숙녀분들! 아! 숙녀, 나의 실수"
"아가씨들 나이를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서로가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하니까!"
"나하고 진실이 보다는 한 살 어리다고 들었고 "
"여기는 제 친구 진실이 김진실"
"야! 진실아 네가 직접 인사해라?"
항상 자신감에 넘치는 진실 씨가 떨리는 가슴에 말까지 더듬으며 자기 이름 석자를 겨~우 말하고 자리에 앉자. 진실 씨의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을 눈치챈 일철이가 재빠르게 다독이는 말로 중얼댄다.
"생전 그런 적 없던 놈이 별일이네~, 촌놈처럼 긴장하고 그러냐?"
진실 씨를 향해하는 말인지!! 혼잣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소리가 자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중얼 대더니 영미 씨를 향해 말을 던진다.
"영미 씨 저는 알지만, 진실이와는 초면이니까? "
"친구인 영미 씨가 소개 좀 해주세요"
"아 네~~"
아까 일철 씨가 숙녀라 했다고
"숙녀요~"라고 되받으며
작은 미소를 띤 채 영미 씨가 소개한다
"여기 제 친구, 예쁜 숙녀분은~~"
"이름이 사랑이에요!! "안사랑""
일철이가 사랑 씨 이름에 대해 거든다.
"진실아 사랑 씨 이름 예쁘지, 진짜 이름처럼 사랑스럽게 생기셨잖아!"
"부담 갖지 말고 잘해 봐라"
"그리고 잘 되면 알지?"
"양복 한 벌로 퉁치면 안 된다"
이 말을 들은 사랑 씨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살짝 띠면서, 진실 씨의 반응을 살피는 듯 진실 씨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겸연쩍은 듯 진실 씨는 혼자 말로 중얼거린다.
"잘해 보기는 뭘 잘해봐 인마..."
이렇게 네 사람은 맛있는 빵과 투명 유리병에 담긴 흰 우유를 맛있게 마시며 두 사람의 앞길이 막힘없이 하얗게 펼쳐지길 기대하면서 시원스럽게 쭉쭉 들이마셨다.
일철이와 영미 씨 두 사람이 사랑 씨와 진실 씨의 거대한 인생사 첫 발을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오작교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이날 이후 사랑 씨와 진실 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매일매일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일철이와 영미 씨를 제외하고 둘만의 데이트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당시 진실 씨는 자취집이 대림역 근처였고, 사랑 씨는 고향인 경기도 본가에 살면서 퇴계로에 있는 봉사단체 클럽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랑 씨의 직장은 봉사단체 겸 친목단체이다 보니 일반 직장인들 보다는 근무 여건이 조금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시간도 여유 있게 활용이 가능했다. 그래서 진실 씨가 수업이 없는 날이면 사랑 씨는 자연스럽게 진실 씨 집에 와서 밥도 같이 해 먹으면서 둘만의 데이트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사랑 씨와 진실 씨가 진실 씨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데이트를 하기 위해 슈퍼에 갔는데, 새로 나온 술이라면서 판촉행사를 크게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소주 막걸리 맥주 말고 약한 술이 아직 없었는데 일본 술 정종처럼 도수가 약한 술을 국내 주류회사에서 새롭게 출시했다면서 따뜻하게 데워서 먹으면 훨씬 풍미가 있고 맛있다고 하면서 홍보용으로 한 병씩 나눠 주었다.
판촉행사용 술이지만 공짜로 받았고 처음 먹어 본다는 설렘에 따뜻하게 데워서 마시란 말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사랑 씨와 즐겁게 둘이 준비한 음식에 심취해 진실 씨 혼자서 단숨에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사랑 씨는 집안 대대로 술을 마시지 못했던 관계로 술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고 진실 씨 또한 술을 마셔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아 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알지 못했다.
공짜로 받아와서 마신 술은 공짜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주나 막걸리 맥주처럼 톡 쏜다거나 달짝지근한 맛은 느낄 수 없었고 그저 밋밋한, 물에 소금을 많이도 아닌 약간 탄 것처럼 심심한 맛으로 진실 씨 입맛에는 좀 어딘가 어색한 감이 역역 했으나 알코올 도수가 소주보다는 좀 낮다 보니 술술 잘 넘어갔다.
그러나 그날은 사랑 씨가 저녁에 집에 일이 있어서 꼭 들어가야 하는 날이었다. 배도 부르겠다 소화도 시킬 겸 진실 씨는 사랑 씨를 청량리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고 함께 지하철을 탔다. 시간이 서로 맞을 때 가끔씩 사랑 씨 퇴근길에 편안하게 지하철 데이트 하던 코스 이기도 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걸까? 종각역을 지날 무렵부터 진실 씨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자꾸 토가 나오려고 한다면서 괴로워했다.
힘들어하는 진실 씨를 보면서 사랑 씨는"혼자 간다고 할 걸 괜히 함께 나섰나!!!" 후회가 되기도 하고....
저녁 준비를 했던 과정을 몇 번이고 되뇌어 생각해 보지만 딱히 잘못된 점은 떠오르지 않았다.
"혹여 저녁 먹은 것이 체 했나?"
"아니 뭐 잘못 먹은 건 없는데"
"함께 같은 음식을 먹은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 왜 저 사람만 그럴까?
"여기서 내려서 혼자 집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함께 청량리역까지 가자니 너무 힘들어하고...."
사랑 씨는 무엇 때문인지? 이런저런 오만가지 별 생각을 다 해 본다.
어렵게 어렵게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사랑 씨네 집을 가기 위해서는 성북행 열차로 청량리역에서 바꿔 타고 지상으로 나와 첫 번째 역인 석계역에서 버스로 다시 바꿔 타야 했다.
당시에는 성북행 열차가 많지 않아서 지하 청량리 역이 상행선 하행선 어떤 열차든 개찰구를 다시 통과하지 않고서도 모두 탈 수 있는 공용플랫폼으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서 기다렸다 성북행 열차를 바꿔 타고 집에 가곤 했었다.
그런데 열차 안에 있다가 청량리 역에 내리자, 밖에서 대기하던 후덥지근한 공기가 지하철 통로를 따라 매섭게 밀려들어오면서 플랫폼 안의 수많은 사람들 냄새와 뒤섞여 지하철역 안 공기는 여간 역겨운 게 아니었다.
원래 지하철 안에 있다 밖에 나와 바깥공기를 마시면 좀 더 편안해지는 것이 보편적인데, 진실 씨는 이 역겨운 냄새가 억누르고 있던 토를 더욱 자극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지하 역사를 여기저기 둘러봐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고 웅성 거리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진실 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충혈된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주변사람들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더 이상 못 참고 사랑 씨와 정성껏 만들어서 맛있고 즐겁게 먹었던 저녁식사 메뉴를, 누가 확인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확인하면서 모든 것을 어둠 컴컴한 선로를 향해 내뿜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운 사랑 씨는 얼른 진실 씨 등을 두드리며 감싸 안고 바라본 진실 씨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져서 정신을 잃을 것처럼, 어깨 힘은 다 빠져 축 처져 있고 얼굴은 밀가루처럼 하얗게 창백해 보였다.
사랑 씨는 약속 때문에 집에 가야 할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진실 씨는 계속 아파하고...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랑 씨 옆에 있게 하는 것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진실 씨를 혼자 집에 보내봤자 돌봐 줄 사람도 없었다.
저녁에 먹은 모든 메뉴를 확인시키느라 기운이 다 빠진 진실 씨를 이끌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건지 진실 씨는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한마디 묻더니 다행히도 버스가 자기 안방인 양 금세 곯아떨어지더니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깨지 않고 푹 잤다.
버스 종점까지는 진실 씨를 어떻게든 끌고는 왔는데 어디다 재워야 하나!!! 그렇다고 집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집에 데려간다면 사랑 씨 집에서는 난리가 날게 뻔한 일이었다.
당시 사랑 씨는 위로 혼기가 꽉 찬 오빠가 있었는데, 여자친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혼할 생각을 1도 갖고 있지 않아서 사랑 씨 부모님들이 매일매일 근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내에 나이도 아직 어린 사랑 씨가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간다는 것은 자폭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어디 여관에라도 우선 재워 놓고 집에 가서 일을 보고 부모님 몰레 다시 나올 생각으로 여기저기 여관을 찾아보는데 20년을 넘게 살았던 동네지만 관심이 없어서 인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힘이 다빠저 있는 진실 씨를 이끌고 한참을 헤맨 끝에, 저 구석진 골목길 한편에 여인숙이라고 쓰인 깜박이는 불빛이 어렴풋이 보여서 그곳을 보자마자 맘이 급한 발길은 이미 그 불빛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앞에는 조그만 실개천에 물이 흐르고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진실 씨와 함께 개천으로 굴러서 쌍으로 자연목욕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심조심 진실 씨를 부축해서 여인숙 대문 앞에 섰는데, 여기는 숙박을 하는 여인숙이 아닌 일반 가정집이었다. 가정집에서 남는 문간방 한 칸을 빌려 주면서 여인숙이라고 영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대문은 세월에 그을린 짙은 밤색 소나무 송판으로 되어 있었고 문턱도 여느 시골집 대문 문턱처럼 울퉁불퉁 구부러진 소나무를 통째로 대충 깎아 만든 것을 기둥에 고정해 놓고 이 것이 출입문 문턱이라고 넘나드는 전형적인 가정집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밤은 깊어만 가고 다른 장소를 찾을 수도 없어고 시간도 급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특히 이 지역은 시내에서도 좀 더 들어가는 시골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저녁 9시만 넘으면 대중교통은 모두 끊기고 없는 터라, 달리 시내로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사랑 씨가 집에 들어가기로 한, 시간이 이미 지나서 빨리 체크인을 하려고 집주인을 불렀는데 행색이 나이가 지긋하신 여느 동네 할머니와 똑같으셨다. 방도 하나뿐인 관계로 우리가 선택할 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정집에 문간방 한 칸이 여인숙 방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 한 칸이라도 감사했다. 방 구조 같은 건 확인할 틈도 없고 해 보았자 다른 방도도 없지만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다.
진실 씨를 일단 방에 쑤셔 넣듯 밀어서 들어가 쉬게 하고, 사랑 씨는 숨 가쁘게 어두운 밤거리를 헤치며 집을 향해 걸음마를 재촉했다.
20여 년이 넘도록 이 동네에 살면서 아무리 늦어도 막내공주라 부모님들이 마중을 나와서 항상 부모님과 함께 다녔다. 더군다나 유독 무서움을 많이 타고 겁이 많아, 혼자서 늦은 밤길을 걸어서 집에 가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사랑 씨가 혼자서 이 무서운 밤길을 헤처 간다는 건 아마도 깊어가는 진실 씨와의 사랑의 온도가 점점 가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사랑의 힘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실 씨는 한참을 세상모르고 자고 나서 겨우 정신이 들어서 보니,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들어와 자고 있는 건지? 아른 아른 만 거리지 도저히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밖을 확인해 보려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살짝 열었다. 오래된 구옥인지라 나무창틀마저 부서질 듯 삐그덕 대는 소리가 났고, 창문틀 높이는 일어선 진실 씨의 무릎높이에, 바로 앞은 둑길 하천변이었다. 둑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진실 씨가 묶고 있는 방 안을 무심결에 처다 보지만 이는 방 안에서 일어 나는 모든 광경이 생중계로 시청이 가능할 정도로 창문턱이 낮았고, 삐그덕 대는 창문은 유리가 투명하기는 한데 아주 얇은 옛날 초등하고 유리창문과 똑같아 날아가다 부딪치는 파리가 닿아도 깨질 것처럼 얇아 보였다.
날씨가 초가을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겨울이었다면 아마도 아파서 정신없었던 진실 씨는 추위에 동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상상도 들었다.
이제 깨어난 진실 씨 생각에도 여기까지 오게 된 정황은 모르겠으나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관계로 오늘은 여기서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리적 위치마저도 구분하기 어렵게 어둠이 누르고 있어 앞이 안 보이고, 사랑 씨도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고...
진실 씨는 정신을 차리고 난 이후로 잠이 오기는커녕, 그렇게 울렁거리던 속도 어느 정도는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이 깨고 나니,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혼자서 뒤척뒤척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기저기 방안을 둘러 시계를 찾아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누군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사랑 씨였다, 얼마나 급한 걸음으로 무서워하면서 걸어왔는지 땀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을 사랑 씨 건만, 지금 막 집에서 갈아입고 온 겉옷까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이마에서부터 머리카락 속까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는 모습이,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대책 없이 무방비로 비를 맞아 흠뻑 젖은 것처럼 완전 비 맞은 생쥐 꼴이 되고 말았고, 두렵고 무서움에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진실 씨 품 안에서 벌벌 떨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위로하며 하룻밤을 여인숙에서 뜬 눈으로 지세고, 깊어 가는 마음의 정을 서로가 확인한 후 아침 일찍 날이 밝아 오자, 채 어둠이 다 걷히기 전에 사랑 씨는 밤새 집에서 잠을 잤던 것처럼 하기 위해 다시 집을 향해 어젯밤 그 길을 다시 혼자 걸어서 갔다.
진실 씨는 빨리 시간이 흘러서 학교도 마치고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으면, 편안하게 사랑 씨네 집에 인사도 드리고 부담 없이 사랑 씨네 집을 드나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사랑 씨도 그렇게 힘들고 무서운 길을 혼자가 아닌 진실 씨와 함께 당당하게 집으로 함께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도 않을 것임으로,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鶴首苦待 기대하고 있었다.
사랑 씨가 집으로 떠난 후, 진실 씨는 사랑 씨가 어제저녁과 오늘 새벽 혼자 걸어서 오갔을 길을 돼 짚으며 걸어가 보기로 했다.
날이 밝은지 한참이 지난 아침인데도 인기척 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정구역 상으로는 대도시라고 하지만 전형적인 시골산길로 한참 외져 있고, 좌우가 모두 가로수는 보이지 않고 대신 빽빽하게 과일나무들로 들어 찬 과일밭인 편도 일처선 길, 민가나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적은 아예 보이지 않는 시골산길과 다를 바 없는 으슥한 과일밭 길이었다.
"사랑 그것이 뭐라고!!! 그 여리디 여린 사랑 씨가 진실 씨 혼자 두지 못하고, 20여 년을 키워 주신 부모님 마저 속이면서, 그 밤길을 왕복으로 걸어서 오가며 진실 씨를 간호하고 보살피며 밤새 함께 하고 싶어 했을까?"
진실 씨는 어젯밤 고생한 본인도 본인이지만,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엄청나게 무서운 밤길을 혼자 오고 가며 고생했을 사랑 씨를 생각하면,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책감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이!!! 국산 정종이라더니"
"공짜 술!!!"
"다시는 안 마신다."
"처다 보지도 안을 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실 씨는 원래 도수가 약한 술은 잘 마시 질 못했다. 술도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소주 맥주를 제외한 나머지 술을 마신날에는 꼭 탈이 났었다.
그날도 다른 음식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단지 국산 정종이라는 그 공짜 술만이 원인 일 것 같은 생각만이 마음속 깊이 자꾸 되새겨졌다.
진실 씨는 그날 이후로는 "국산 정종이라는 그 이름!!!" 말만 들어도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또 토할 것만 같아서. 단 한 모금도 마신적이 없단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사랑 씨의 마음만큼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서 좋았다.
이런저런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며 많은 시간이 흘러 사랑 씨와 진실 씨는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사랑을 하나하나 잘 가꾸며 알차게 키워 갔다.
사랑 씨 와 진실 씨 두 사람의 평행선 여정은 이렇게 탄생되었고, 첫 발걸음을 띨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