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방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손님은 부동산으로 돌아왔다. 상혁은 그녀가 원했던 타입으로 서너 가지 매물을 인터넷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추후 방문할 수 있는 가까운 날짜를 하루 잡아 알려주기로 했다.
간단하게 상담을 마무리했던 건 손님의 눈이 퉁퉁 부어 오늘은 이만하면 좀 쉬어야 될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그녀를 보낸 후 문이 닫히자마자 상혁은 뭔가 결심했는지 주인장의 응접실로 향했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마침 이유는 응접실에서 아직 고담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들려요. 대화가… 그러니까..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린다고요.”
고담이랑 놀아주던 주인장이 갑작스러운 상혁의 말에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의아해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췄다. 반면 상혁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혹시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지 걱정반 당황함 반으로 그녀에게 재차 말하기 시작했다.
“ 사무실을 나가서 동네 카페에 가 있는데도 들려요. 사장님이랑 손님이 나눈 대화가.. 이건 제가 환청을 들은 건지 싶을 만큼 너무 황당해서 이야기도 안 나오는데 그렇다고요..”
“ ..손님과 내가 나눈 대화가 들린다고?”
순간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 네. 처음엔 방음이 안돼서 소리가 어딘가 통로를 타고 들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소리가 전달되는 부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저기 멀리 동네 카페에 갔는데… 밖에서도 계속 들렸다고요. 이건 마치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거예요. 이야기 시작부터 끝까지요!”
몇 시간 내내 상혁은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커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다 들어왔다는 것이다. 주인장과 손님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무리해 갈 때쯤 상혁이 시간 맞춰 복덕방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 그 무슨 인간 프로그래밍이라는 이야기랑, 그 어머님이란 분이 그 손님이 여성스러운 모습이 되는 걸 하지 못하도록 한 부분이나 이런 거 제가 머릿속으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거죠? “
“ 음.. 흠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고담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던 게.. 우연이 아니었나?”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주인장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입을 질끈 다물었던 주인장이 말을 이었다
“ 그럼 어쩔 수 없지..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대신 우리가 계약한 계약서대로 비밀유지를 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생길 거니까 그건 절대적으로 유의하고”
“ 그렇지만 손님에겐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걸 어쩌면 좋죠. 다들 사생활을 밝히고 싶지 않을 텐데요.”
“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니잖아. 남 이야기 듣는 것도 쉬운 거 아니야. 참고 자료를 좀 더 조사해 볼 테니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
상혁은 이런 환청 같은 소리가 한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공간으로 전달된다는 게 이해불가였다. 공기가 없이 매질이 없이 소리가 전달된다고? 이젠 자신이 잠시 착각한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동산에 첫 손님이 찾아오고 들떠서 생긴 그런 현상 말이다.
…
“ 그래, 분명 어딘가 연결된 있는 게 분명해.”
날이 어두워져 상가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운 상혁이 중얼거렸다. 주인장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대화를 들으면서 손님이 느낀 감정이나 이미지들이 상혁에게도 함께 떠올랐다는 거다. 생각보다 무거운 기억들, 육중한 편견들, 그 손님을 향했을 그녀 모친의 날카로운 말들이 마치 그 자리에서 손님이 당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느낌까지 뒤섞여서 말이다.
그래도 왠지 그 대화가 들릴 때보다는 손님이 부동산을 나갈 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던 것 같았다. 상혁은 꿈속으로 꿈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
진한 분홍의 안개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낮인지 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데다 어디까지가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안개인지 남자는 구별할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밀도가 높다.
분명 어두워서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분홍색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건 낮이어서 그런 걸까. 머릿속도 뿌연 생각으로 채워지듯 돌아가지 않는다. 눈을 크게 뜨고도 볼 수 있는 건 온통 짙은 분홍색의 안개, 안개, 안개들.
이 미궁 속엔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 같은데 분명 다른 사람들이 이 안개의 어딘가에 있는 게 확실한데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손을 살살 저으면서 앞으로 나아가 본다. 무언가 확정되어 있는 상태. 안개를 저어서 가는 손가락 사이로 분홍의 안개 입자들만 엉기듯 스쳐 지나간다.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걸리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 무언가가 손가락을 배일만큼 날카로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남자는 손을 촉수처럼 더듬거려 간신히 한 발씩 떼어 보고 있었다.
‘ 무어라도 걸려야. 제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그 순간 땅이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에 안개들도 진동한다.
[쿵. 쿵쿵.]
깜짝 놀라 움츠려든 어깨를 최대한 낮추고 말한다.
“ 누구 있어요?”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겁에 질린 신음 소리가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 댕댕댕댕 ”
그렇게 긴장해 있는 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긴급한 알람이 울린다. 순식간에 무슨 소리인지 깜짝 놀라 상혁이 깨어났다.
…
상혁은 베이컨과 소시지 간단하게 계란 한 개씩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스트까지 두 접시를 준비해 응접실로 가져갔다. 주인장이 커피를 내오고 고담이용 아침 식사는 미리 주었는지 먼저 자리 잡은 고담이가 어서 오라는 듯 야옹거린다. 방금 내린 커피가 고소함과 함께 씁쓸하면서도 상큼한 향기가 온 데에 가득하다.
“ 어제 조사를 좀 해봤는데. 고담이랑 동화되어 있어서 그 소리가 전달된 것 같아. 흠.. 고담이가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네게 전달해서 듣게 되는 거지”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쓰고 온 주인장은 뭔가 관련된 책을 좀 더 읽어 나가는 듯하더니 역시나 별로 도움은 되지 않는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 네?? 고담이가 저랑 동화되어 있다고요?”
“ 응. 백 퍼센트는 아닌데 그럴 가능성이 많아 보여. 그런데 어떻게 끄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처음에 네가 고담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뭐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오히려 이건 고담이 의지에 가깝다고 할까. 내가 더 알아봐도 어떻게 하진 못할 수도 있어. 특히 네가 처음 들어왔던 이 응접실이란 공간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아. 혹시 다른 시간에도 어떤 소리가 들린 적 있어?”
“ 음.. 아뇨 어제가 처음이었어요”
“ 아.. 그럼 다행이고.”
그녀는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무언가를 들어버린 건 아닐까 하고 우려했던 것 같다. 고민이 풀렸는지 이제 맛있게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있는 고담이를 바라보며 이 녀석이 듣는 게 자신에게도 들리는 거라니. 상혁은 잠시 큰 숨을 쉬었다. 주인장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는 건지 하며 잠깐 있는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편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어제 왔던 그 손님은 적당한 월세 매물을 알아봐 주기로 했어요. 회사 일정이 좀 바쁘다고 삼주 후로 다시 약속을 잡았거든요.”
“ 그래? 이곳에 온 손님은 모두 자연스럽게 계약을 하게 돼있어. 매출 걱정은 너무 안 해도 될 거야. 디테일까지 모두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 그런데 그 분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저랑 모니터로 집이랑 장소를 다시 잡으려고 보려고 해도 이미 너무 부어서 거의 실눈 뜬 것처럼 있다가 갔거든요.”
잘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무슨 말이지라며 한쪽은 이유가 한 말을 해석하느라, 다른 한쪽은 어제 상황을 설명하느라 두 가지로 생각이 떠오르는 상혁이었다.
“ 누구든 무언가를 강요받으면서 자란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그게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는 조언의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말이지.
정말 그게 조언인지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막기 위해 아이에게 강요하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무척 어려운 거랄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 이런 질문과 닿아있거든.
어린아이일 때는 특히 더 여리고 사랑이 많아서 부모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곤 하니까. 뭐 그게 어린아이들의 생존방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먹이고 입힌다고 자식을 자기 뜻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니야”
무언가 생각이 많아졌는지 주인장은 소파에 앉아 허공에 오른손에 든 포크로 무언가를 그리며 웅얼웅얼 읊조린다.
“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좀 놀랐어요. 잠재의식 무의식 뭐 이런 말들이야 꽤 들어 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해봤으니까요. 그 손님이 원하는 데로 살도 빠지고 원하는 모습을 찾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잠재의식을 내면의 세팅이나 설정이라고 본다는 게 좀 신기했달까요. ”
“ 예전엔 잠재의식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의식이 없다는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쓸 만큼 알려진 게 없었어. 지금은 점점 알려지고 있고. 놀라운 건 인간이 하는 선택의 95%는 잠재의식이라는 연구가 있을 만큼 자신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되지.”
“ 95% 라구요? 그건 너무 하지 않아요?.. 인간에겐 의지라는 것도 있잖아요. 자유의지라고요.”
“ 우리는 의지로 자신이 대부분을 선택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눈을 떠서 움직이는 거의 모든 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무의식적 방식의 루틴을 수행하는 거야. 물론 5%라는 의식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 사람마다 생각을 해 나가는 방식과 성격까지도 자신만의 방식이 있잖아?”
“ 그게 내 의식이나 의지가 아니에요? ”
“ 자동화 프로그램 95%, 깨어있는 상태 5%가 만나 한 인간이 매번 행하는 비슷한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이라고 할까?”
“ 에..? 그럼 그 95%는 어떻게 누가 만드는데요?”
" 글쎄.. 그걸 누가 만들었을까..?"
그녀는 잠시 알쏭 달쏭한 표정을 짓더니 상혁을 한번 보고는 포크를 들고 마저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