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 변할 때 나타나는 현상
분명 나른한 오후였다. 하지만 상혁의 마음만은 분주하다. 지금 상혁은 네 번째 손님이 인생에서 계속 실패를 반복했던 원인을 처음부터 되뇌고 있던 중이다. 운을 불러들이는 것도 못 오게 막는 것도 내면의 설정이라니. 얼핏 들으면 불합리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이야기다.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난해하다. 다만 처음 보았던 해변가 소년의 모습이 안쓰럽게 계속 떠올랐다.
“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문할게요. 그리고 그때 먹었던 토스트도 부탁드려요.”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손님이었다. 멍 때리듯 프런트에 앉아있던 상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문받은 메뉴를 준비해 테이블로 가져갔다.
“ 저.. 이번에 이사해요. 오늘은 집을 알아보러 왔어요.”
커피와 토스트를 가져온 상혁에게 그녀는 얕은 미소 지으며 덧붙이듯 말했다. 상혁은 그제야 그녀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왔었던 두 번째 손님이라는 걸 눈치챘다. 어딘지 편안해진 인상과 함께 옷의 색감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전혀 알아보지 못한 상혁은 약간 놀랐지만 이내 대답했다.
“ 그럼, 이번엔 딱 맞는 좋은 집을 찾아 드려야겠네요.”
…
상혁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차를 내온 후 주인장과 손님을 두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 다시와도 왠지 마음이 놓여요. 이곳과 사장님은.. ”
“ 마음이 놓인다니 좋은 신호네요.”
" 그때 너무 늦게까지 이야기하고 낮잠까지 자고 갔는데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어요. 감사했습니다."
" 뭘요. 여기서 자주 있는 일이니까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담백한 이유의 대답에 오래간만에 찾아온 그녀는 한결 마음이 놓였는지 이내 그 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곳을 다녀가고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곧 이사할 곳도 알아봐야 하고.. 그래서 왔어요.”
“ 그 후로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 네.. 실은 요즘 가족들과는 연락을 거의 안 해요. 친구들이랑도. 몇몇과는 아예 헤어졌어요. 이제 만나지 않으려고요.”
“ 아..”
이유는 찻잔에 시선을 두고 뭔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 가족들이 연락할 때나 친구들이 저를 불러 낼 때 거절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심장이 두근거려서..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로요. 그래도 불러내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또 그 패턴을 반복하는 게 싫어서 거절하는 걸 연습했더니.. 잘 안되다가 처음 성공하고부터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죠. 그런데 이젠 아무도 저를 부르지 않아요.”
“ 그럼 요즘 기분은 어때요?”
“.. 약간 외롭기도 한데.. 사실은 편해요. 그래서 알았어요. 제가 그동안 힘들어했다는 걸요. 다른 사람의 감정적인 이야기를 반복해 들어주는 거요.”
“ 그렇군요.”
“ 음.. 계속 이래도 되는 건지.. 이러다가 정말 저 혼자 아무도 없이 늙어 죽는 건 아닐까, 영원히 다른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
“ 그런 생각 들 거예요. 지금 시점에 딱.”
이유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한 가지 질문을 할 건데 잘 느껴보고 대답해 봐요.”
“ 네..”
“ 몸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지금 이 시간이 무척 필요하다고 느끼는지 아니면 잘못된 거라고 느끼는지. 머리로 떠오르는 불안이나 걱정의 시나리오 말고 그냥 몸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깊숙이 있는 나의 몸에게 말이죠. 끊임없이 깨어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만드는 의식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것에 집중해야 해요. 크게 숨을 한번 쉬었다가.. 요즘의 이 시간들을 어떻게 느끼는지. 눈을 감고 느껴봐도 좋고요.”
또 특이한 걸 물어본다 생각했는지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눈을 감고 큰 숨을 한번 내 쉬며 그 몸의 느낌이라는 걸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 편하대요. 이렇게 더 있고 싶대요.
당분간은 다시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러 어떤 공간으로 가고 싶지도 다른 사람에게로 주의를 집중하고 싶지도 않데요. 그럼 에너지가 많이 든다고요. 지금은 그럴 에너지도 없데요.”
마치 누군가의 말을 전하는 듯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자 이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아.. 눈물이 왜 또 나지..? 그동안 너무 많이 울어서 더 울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정말 힘들었던 게 다시 느껴져요. 씁쓸하기도 하고요.”
이유는 익숙한 듯 옆에 있던 휴지를 몇 장 뽑아주며 주의 깊게 손님을 바라보았다.
“ 지금 울고 있는 건, 자신의 내면의 아이예요. 어릴 적부터 누적되어 왔던 감정이 통로가 열리면서 밖으로 나오고 있는 거고요.
늘 스스로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느껴보지 못했죠.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감정만을 받아들여왔으니까요. 이제 그 힘듦을 알고 스스로 상대방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자신의 무의식적 모습을 끊어내는 선택을 한 거예요.
그들이 아니어도 자신이 우선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첫 단계예요. 매우 중요한 단계죠.
아이의 슬픔이 인정받자 몸 밖으로 나오면서 동시에 기뻐하는 거예요. 눈물이요.”
“ 그런 걸까요..? 솔직히는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있고 싶어요. 그저 나 자신으로요.”
“ 사실 그래야만 하는 시기예요.”
“ 그래야만 하는 시기요?”
“ 내면이 변하면 그에 맞춰서 손님과 관계된 사람들이 바뀌고 일어나는 사건도 결이 달라지죠. 결국엔 펼쳐지는 세상이 변해요. 신기하죠? 손님 내부의 파동, 즉 설정이 바뀌는 시기에 기존의 방식으로 연결된 많은 사람들과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래야만 하는 필연이죠.
한 개인의 내면의 변화가 표현되는 맨 처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니까요.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잖아요.”
“ 그럼 제가 거절을 시작으로 제 친구들과 거의 헤어진 게..”
“ 이제 시작이에요. 친구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제 파동상 그 친구들과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던 것이 맞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인 거죠.
예전의 손님 내면에는 나에게 와서 어려운 걸 다 이야기해 봐. 내가 다 들어줄게. 그리고 너희들도 나를 인정하고 아껴줘. 이런 몸의 세팅 즉 느낌이 있었다면요. 지금은 일단 멈춰. 나는 나에게 좀 더 귀 기울이고 싶어.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지금은 없어라는 파동을 내뿜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에 맞게 지금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 기존의 인간관계가 정리되고 내부를 청소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
“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존의 친구들이 나쁜 사람이라서 헤어지게 되는 것보다 맞지 않아서 헤어지게 되는 겁니다. 억지로 기존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사람은 서로 알고 지내는 시간만큼 상대방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게 되니까요. 친구사이에도 서로 마음속 역할이 한번 정해지면 그걸 정답이라고 생각하곤 하죠. 그게 정답이고 변화된 모습은 이상하다와 같은.. 우리는 모두 한번 익숙해지면 그걸 옳다고 느끼는 관성이 있답니다.”
“... ”
“ 이 역할에 대한 편견이 사람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요. 너 변했다, 혹은 네가 이러면 어떻게 하냐는 등. 친구 중 한 명이 기존의 해주던 역할을 안 하겠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왠지 풀이 죽은 듯 대답했다. 아마 여태껏 공들여 함께 해왔던 친구들도 가족들도 자신을 그렇게 볼 것이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의 변화과정이에요. 가족은 더 심하고요. 고정관념 속에 있는 거죠. 그것을 바꾸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정리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 변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매우 간혹 있을 거예요. 그때는 알 수 있죠. 나와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는 진짜 친구라는 걸요. 서로 알아봅니다.”
“...”
“ 그렇지만 그건 시간이 지난 후에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거예요. 지금부터 고민할 일은 아니에요.”
“ 솔직히 지금은 가족이든 친구든 신경 쓸 에너지도 없어요.”
“ 맞아요. 지금 중요한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입니다. 몸의 내면 아이에게 다시 물어볼래요? 사람들과 만남을 거절한 현재의 나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고맙대요. 자신이 힘들었던 걸 알아줘서요..”
다시 눈을 감았던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는데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몸으로 울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앞으로도 그 아이와 지금처럼 자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어떤 시간이 필요한지. 무슨 경험이 필요한지.”
“ 음.. 시간이 지나면 다른 변화도 올 수 있나요?”
“ 당연히요. 지금은 혼자 있는 게 필요한 시기이고 이 시간에 자신을 충분히 탐험하면 좋겠어요. 세상 넓은 걸 보는 것도 좋고 다른 사람들은 무얼 하고 사는지 보는 것도 좋아요.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흥미가 있고 잘하는지. 혹은 멍을 때리듯 쉬어도 좋고요. 다만 주의할 것은 규칙적으로 산책 같은 가벼운 운동은 꼭 추천해요. 집에만 있고 싶은 마음을 잘 이해하지만 꼭 필요한 건 햇빛이거든요. 그러다 다시금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느낌이 올 거예요. 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그럼 그때 만나세요. 모임이든 어디든 조심스럽게…
그들은 이미 손님이 변화한 시점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역할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서 새로운 역할을 보게 되죠. 그때가 다시 첫 시작이에요. 기존처럼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어요. 비어있던 잔이 아니라 조금은 내가 채워져 있을 테니까요. ”
“ 정말 그런 시간이 올까요?”
“ 물론. 이미 손님 스스로 많은 일을 해냈는걸요. 늘 상대방을 먼저 담으려 애쓰던 손님의 마음이 자신을 찾아서 하나하나 흐르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조금씩 채워질 때마다 느껴지는 소소한 느낌과 스스로에게 계속 집중해 보세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상혁은 손님이 원하는 지역에 매물을 몇 가지 추려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방 한 개쯤에는 볕이 환하게 잘 드는 걸 원해서 왠지 어울리는 매물 두 개만을 추려서 이야기해 같이 보러 가기로 했다.
눈이 부어있지 않은 채 매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복덕방에서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 상혁이었다.
...
“ 사장님 그게 진짜예요?”
“ 응? 뭐가?”
손님이 보러 갈 매물을 정한 후 돌아가자 상혁은 그 길로 이유가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 그거 말이에요. 내면의 설정이 바뀌면 다른 사람, 사건, 세계까지 불러온다는 말이요. 세계관이 바뀔 때 일어난다는 현상이요.”
“ 응. 그런데?”
“ 나도 그거 할래요. 내 설정도 바꾸고 싶어요. 부자 되는 걸로요.”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듯 서랍을 뒤적이며 엉성하게 상혁이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혁의 마지막 말이 어디가 놀라웠는지 물건 찾기를 멈추고는 당황한 듯 그를 쳐다봤다.
“ 헐.. 일단 이 세상에서 자신의 설정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뿐이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린 그저 도움만 줄 수 있는 거고”
상혁의 질문에 이유가 곤란하다는 듯 말을 하자 진지한 표정의 상혁이 더 가까이와 물었다.
“ 그러니까요. 저도 도와주면 되잖아요. 제 무의식에도 들어가서 좀 도와주세요.”
평소와 달리 사뭇 진중한 상혁의 표정에 이유는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이건 비밀인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 잠재의식으로는 못 들어가. ”
“ 에? 못 들어간다고요? 왜요? ”
" 이유까지는 알 거 없고 못 들어간다면 못 들어가는 줄 알라고!"
단호하게 말한 주인장 이유는 무거운 표정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서재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며칠이 지났을까 상혁이 늦은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복덕방에 막 앉으려던 찰나 이유가 카페 쪽으로 건너오며 말했다.
“ 어제 그 커피말이야 덕분에 잠이 더 잘 오던데? 한잔 마실 수 있나 하고”
주인장이 부동산 쪽으로 넘어오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상혁의 갑작스러운 발언 즉, 서재방을 통해 자신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발언을 한 이후 주인장은 아침밥도 며칠째 잘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커피라니.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그 발언으로 복덕방까지 잘리는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던 상혁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마셨는데 잠이 잘 온다고??’
에스프레소에 물을 조금 넣고 그 위에 진한 풍미의 달콤한 생크림을 올리면 훌륭한 아인슈페너가 완성된다. 새로운 메뉴를 내놓자마자 카페에 방문하는 여자 손님들은 열에 아홉은 모두 이 새로운 메뉴를 시키고 있었다. 간간히 오는 부동산 계약 후에 서비스로 무료 음료를 제공했는데 그때도 이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새로운 변화가 한 가지만 와도 이렇게 열광하는구나 하고 새삼 커피메뉴로 유행을 관찰하는 중이라고 할까.
숙면에 도움을 준다는 그 메뉴를 받아 든 이유는 웬일인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복.덕.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바람은 시원하고 끝내주게 깨끗한 하늘이다. 청소를 마저 끝낸 상혁도 이제 커피를 한 잔 하려던 참이었다.
“ 여그가 진짜 다시 열긴 열었네 잉”
손님인가 싶어 상혁이 뒤를 돌아보자 조그마한 몸집의 한 할머니가 묵직한 통을 손님 테이블 중 하나에 올려놓고 있었다. 생활한복처럼 보이는 갈색 저고리와 바지가 그녀의 새하얀 머리색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꽂꽂한 자세의 그녀는 부동산 간판을 정비하고 사무실을 쓸고 닦고 할 때 오다가다 지나가며 복덕방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가 분명했다.
“ 아.. 안녕하세요. 오픈한 지는 그래도 좀 됐어요. 뭘로 드릴까요? ”
“ 뭐 달달한 거 있으면 추천해 줘 봐요. 이젠 쓰디쓴 건 잘 못 먹겠어.”
“ 그럼 아인슈페너로 드릴게요.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해서 좋아하실 거예요.”
“ 뭐? 아인.. 이름은 됐고.. 이 김치, 여기 손녀 딸내미한테 좀 전달해 줘요. 저기 아랫집에서 주더라고 하면 알 거야. 할아버지 때부터 종종 가져다 먹곤 했으니까.”
“ 아. 김치요? 동네분이시군요. 그럼 커피는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 어허~ 김치는 내 마음이고 커피는 이 가게 다시 개업한 기념이니까 내가 계산해야지.”
그녀는 주인장과 꽤 알고 지내는 동네 사람인 듯했다. 게다가 소중한 식재료인 수제 김치까지 들어오다니. 커피를 그냥 내어주려는 상혁에게 그녀는 두말하기 귀찮다며 한복바지 주머니 속 쌈지 지갑을 꺼내서는 만원 한 장을 내밀었다.
“ 이거 맛나네. 잔돈은 됬어요. 참 이 달콤 쌉싸름한 거 이름이? 기억 좀 해두려고"
".. 그건 아인슈페너라고 해요."
" 아.. 아인 수페너.."
그녀는 잠시 이름을 따라 하더니 적절하게 이름이 붙자 이네 다른 곳에 볼일이 있다는 듯 상혁을 보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 총각이 이런 것도 잘하고 여그 손녀 딸내미하고는 좋은 사이인가? 뭐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이긴 허지만.. ”
“ 아? 그게 저는 직원이고 이 집 딸내미는 사장님이시죠.”
호기심이 가득한지 그녀는 가게 이곳저곳을 돌아보고는 방금 전 김치통이 올라가 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상혁이 가져온 새하얗고 검게 층이 나뉜 커피를 신기하다는 듯 보더니 두어 모금 홀짝였다.
“.. 그려. 이제 잊을 때도 됐지… 됐어.. 고생했응께.. 좋은 날도 오고 해야지..”
그녀는 먼데를 보는 듯 아득해진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작동한 상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제가.. 일 시작하기 전에 여기가 꽤 오래 닫혀있었다던데 장사가 잘 안 됐었나 봐요?”
상혁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득해져 있던 손님의 미간이 순식간에 집중해 모이더니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듯 약간의 타박이 담겨있는 듯한 말투가 상혁에게 날아들었다.
“ 잉.. 아니지.. 오히려 반대였지. 장사가 너무 잘 됐어서 탈이었어. 다들 그 복덕방가야 인생 핀다고 하면서 여그로 왔었다니까. 이 집 손녀 딸내미 할아버지가 사주팔자인가 뭔가는 몰라도 사람들이 걱정거리 있으면 도와주고 그랬어. 남 힘든거 열심히 다 들어주고. 살뜰하고 착한 양반이었지. 다들 인생 살면서 어려운 게 많잖여. 많어도 좀 많어야지. 그런 거 이야기하러 복덕방도 오면서 자기 얘기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응께”
“ 아.. 그랬군요.. 예전 사장님 얘기는 전혀 몰라서요.”
“ 여그가 소문나서 손님이 그렇게 버글버글 했다니까.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는 갑자기 장사를 안 하더라고. 가게도 아예 닫아뿔고. 이 집 딸내미 아부지가 아프다고 하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뭐라 소식도 없고 딸내미 얼굴도 도통 볼 수가 있어야지.
그때 한번 본 게 다여. 할아버지 장례 치를 때 말이여. 혼자서 그러고 서있는 게 어찌나 맴 아픈지. 돌아가시곤 김치 가지고 찾아와도 문도 닫혔고 줄 수가 있어야지 나도 살기 바빠져서 잊고 지냈지”
“.. 그런 일이”
“ 이제 다시 열었으니께. 요 아랫 하숙집 할머니가 잘 되길 바란다고 전해줘. 뭐 하숙도 예전에 그만뒀지만.. 그래도 이 집 할아버지한테 신세 진 것도 있어서 고마운 마음 이랑께. 가끔 김치 떨어지면 와요~”
사투리와 표준어가 섞여서 더 정다운 느낌으로 재잘재잘 수다 떨던 할머니는 어느덧 다 마신 컵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 김치 잘 전달할게요. 그리고 다음에 오시면 커피는 제가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 그려~ 그게 좋지!”
…
‘ 촤아악~’
상혁은 기름에 김치랑 양파, 베이컨을 넣고 제대로 볶았다. 맛있게 익은 김장김치는 톡톡 터진다더니 건강하고 맛난 김치다. 아마 그 아주머니가 주인장을 생각하며 가져다준 김치여서 더 그런 것 같다.
완성된 김치볶음밥에 계란 프라이 한 개 얹고 쪽파와 고소한 깨를 솔솔 뿌리자 모른 것이 완벽했다.
“ 와~ 오늘 저녁은 김치볶음밥이네. 오랜만”
맨날 피클 위주로만 먹다가 김치가 어디서 난 건지 아직 이유에겐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다른 때보다도 더 잘 먹는다. 하긴 이 먹깨비가 이틀이나 밥을 잘 못먹었으니까. 상혁은 어쩐지 김치가 어디서 난 건지는 밥을 다 먹고 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라도 생각나서 밥을 못 넘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유가 즐거워하자 고담이도 신났는지 자기 밥 먹는 건 일찌감치 끝내고 인간들의 밥 먹는 걸 감상이라도 하듯 소파 옆 팔걸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느긋하게 쳐다보고 있다.
설거지거리는 부엌에 두고 차를 마실 시간이 되어서야 주인장에게 김치의 출처를 이야기했다. 저기 동네 아래쪽에 있었다는 하숙집 할머니가 가져다주신 거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아.. 그랬구나. 어쩐지 김치가 맛있던데. 할머니는 건강해 보이셔?”
“ 네. 달달하고 맛난 커피 사드시고 가셨어요. 아침에 사장님도 드신 그거요. 그런데 왜 사장님한테 직접 주고 가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어요”
“.. 그러셨구나. 아마 그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시는지도 모르지..”
“.. 에? 그 일이라니요?”
“ 글쎄. 상혁이는 모르는 일?”
그녀의 표정을 보자 더 이상은 예전일을 물어보기가 어려워진 상혁이었다. 뭔가 잠시 멈춘 것 같은 그녀를 보자 상혁은 낯설다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뭐가 있는 거다. 그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 달달하고 씁쓸한 이 커피를 좋아하긴 하나 봐요. 요즘 카페랑 복덕방 손님들 다 그것만 찾아요.”
“ 달달하고 씁쓸하다라... 그래 그랬지. 할아버지랑 아버지 모두 다..”
“ 네?”
예전 생각에 혹시 주인장이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사이 상혁의 예상과 달리 이유는 어떤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나지막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생기복덕이라는 말이 있어.. 예전엔 말이야 오래전에 집을 구한다는 건, 여태까지 살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움직이는.. 인생의 큰 변화를 뜻하는 거였거든. 그렇게 그 일은 큰 일이었지. 복덕방은 원래 그 사람의 복과 덕 그러니까 길흉에 맞게 시기와 장소에 대한 여러 가지 들 중에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었단 말이야. 할아버지 쪽 가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비슷한 일을 해왔었고.."
멍하니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한 이유는 이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 할아버지의 숙명 같은 거였어. 그래서였는지도 몰라. 이런 이상한 서재방을 갖고 있는 건물을 만나게 된 것도. 그리고 가족들이 그렇게 된 것도.."
".. 가족들이 어떻게 됐다고요?"
이유는 이제 아예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상혁이 묻는 말에 반응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조석인 웃음기마저 머금고 힐난하듯 벽의 한 부분을 쏘아보고 있었다.
" 너도 서재방에 네 잠재의식을 보러 혼자 들어가는 건 안돼. 지난번처럼 도와달라고 해. 차라리 그게 나아. 서재방의 공간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잠재의식으로 들어갈 때는 자기 부정을 극복하기가 어려워. 자신을 바보 같다고 자신이 나쁜거라고 생각할 거라면 아예 가지 않는게 낫다고.."
" 사장님 무슨 말이예요. 자기 부정이라니.. 뭘 극복해야 하는데요?"
상혁은 마치 꿈을 꾸듯 생각에 빠져 중얼거리는 이유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유는 그대로 기절한듯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