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YODA Oct 17. 2024

네 번째 손님 4 - 아기 되기



“ 기분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나요?” 


이틀 후 다시 찾아온 남자는 이 질문이 조금 난처하게 느껴졌다. 그는 평생을 기분이나 느낌은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내내 누르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날 이곳을 다녀간 이후로 좀 이상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날 저녁부터 걸핏하면 눈물이 나곤 했다. 지금도 감정은 모르겠고 눈물이 저절로 올라오려던 참이었다.  


“ 저희 세대야 꾹꾹 눌러 담는 게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보니 표현도 못하고 이젠 뭐가 감정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날 저녁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서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눈이 약간 부어있는 상태였다. 


“ 그러셨군요.. 제가 이 질문을 드린 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예요. 우리에겐 모두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요. 


한 사람이 현재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현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겪어온 과거의 경험과 함께 현재를 판단합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접할 때 판단하는 관점이 매우 다르게 되는 이유예요. 어떤 사람은 해당하는 사건을 비관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것을 크게 판단하면서 긍정적으로만 보기도 하는 것처럼요. 그 이외에 사람의 수만큼 수많은 관점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걸 내면의 아이라고 부르죠. 몸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은 지나온 과거 시간대별로 각각의 사건을 겪고 견디어 낸 에너지 상태가 여전히 존재하는 거죠. 다 잊은 것 같이 보여도 당시의 에너지의 상태로 나의 어린 시절이 현재에도 함께 있는 거죠. 물론 기억은 잃었더라도 몸에 데이터로 축적되어 있습니다. 충격까지도요. 


손님의 경우엔 이 내면의 아이가 강력한 선택을 했고 그것이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만 손님의 경우는 그것이 좀 특별하게도 그게.. 단절이었어요.”  


“ 단절이요?” 


“ 네. 좀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어린 시절에 집에 정원이 있었나요?” 


“ … 네 뭐 시골집이었으니까요. 가운데 조그만 꽃밭이 있었습니다. 동그랗게 돌로 단을 쌓아서 만들어져 있었죠. 집둘레엔 큰 나무들이 많았지만 그 꽃밭엔 작은 꽃들이 사시사철 다르게 피어 있었고요. 그런데 그게 단절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 그랬군요.” 


이유는 무언가가 더 명확히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 아주 어릴 적 손님은 부모의 갈등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물론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손님의 경우 타고난 성향상 더욱더 그 부분을 매우 큰 혼란 또는 혼돈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 음… 네두 분 다 싸울 때는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들이었죠. 다른 집이야 어떤지 경험해 보진 않았지만요.” 


“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이 다투는 상황이 자주 연출됐죠. 아이 앞에서도요. 아이는 평화를 원했고 부모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해 이야기합니다.  


 싸움을 멈추라고요. 


그러나 자신들의 감정에 이미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의 부모는 그런 상태에선 누구의 말도 듣지 못합니다.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하는 상태죠. 듣지 못하는 부모들의 상태를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는 생각합니다. 


‘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의견을 말하는 건 잘못된 거군. 그 무엇도 소용이 없어. 허무하고 절망스럽군..’ 


이 아이 혹은 아이는 그렇게 최초로 세상과 자신을 강하게 인식합니다. 갈등과 혼돈의 세상과 무엇을 해도 소용없는 무력한 자신으로 말이죠. 그저 몰랐을 뿐인데 이 아이는 부모를 탓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뭐.. 크게 싸우시긴 했지만.. ”


“ 아기는 있는 힘껏 부모의 싸움을 중재해 보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로 격분한 상태에서 아기의 공포나 두려움 그리고 평화를 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부모는 별로 없으니까요.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는 주변 분위기와 파동으로 이 모든 것을 인지합니다. 대 부분의 사람은 너무 어려 기억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때에도 아기의 의식은 심연에서 살아서 대부분을 알고 있어요. 


그때 아기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도 몸으로 생각하는 거죠. 언어가 아닌 몸과 느낌을 움직여 판단한다는 게 중요한 핵심이에요. 


아기는 의견을 듣지 않고 계속 부모가 싸우는 것에 대해 자신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싸움을 멈추라고 하는 말이 옳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 싸우는 것이라고 판단하죠. 


그래서 아기는 떠나기로 합니다.” 


“ 떠난다고요? 어디로 말이죠?” 


“ 아직 걷지도 못하고 부모 없이는 세상에서 무엇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아기가 떠난다고 하니 전혀 말이 안 돼 보일 거예요. 하지만 아이는 몸은 부모 곁에 있어도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기로 결정해 버립니다.” 


“ 부모 옆에 멀쩡히 있는 아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건지… 더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유는 손님의 반응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 몸은 있지만 마음과 주의력은 다른 곳으로 보내 부모가 있는 현실과 단절하는 겁니다. 그게 아이가 그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거예요. 손님의 경우엔 집에 있던 정원으로 주의를 돌리고 부모가 있는 갈등 가득한 현실을 떠나 그곳에 머물기로 선택했었던 겁니다” 


“아..” 


이유의 마지막 말에 남자는 무언가 알듯한 건지 알 수 없는 탄식 같은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다소간의 침묵이 흐른 뒤 무겁게 닫혀있던 문을 열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좀 더.. 커서는 자주 놀았어요. 그 정원에서요. 부모님들이야 늘 다투시는 상황이라 아기 때는 기억이 안 나고 그저 언제가부터는 정원 한가운데에 있던 넓고 편편한 돌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죠. 거기 꽃들은 늘 평화로웠거든요. 있는 그대로 저를 반겨줬어요. 


사시사철 모두 다른 모습이었죠. 새로운 꽃들이 움터서 나올 때 어떤 꽃일까 설레며 기다리던 마음과 꽃망울이 터질 때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볼 때나 벌이 바지런히 꽃가루를 잔뜩 묻혀서 갈 때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리던 것과 겨울엔 하얗고 소복한 눈이 내린 것 하며.. 


집안이 시끄럽거나 이유 없이 혼나거나 어떤 울적한 마음이 들면 늘 그 정원으로 달려갔죠. 나무들 곁에서 놀다 보면 그런 기분은 잊혔어요. 그러고 보니 그 꽃들과 나무들에게 정말 고맙네요. 늘 제 곁에 있어줘서..” 


남자는 이제 티슈가 필요할 만큼 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유는 예상했던 듯 바로 옆의 티슈상자를 남자에게 건넸고 한참을 그렇게 울 수 있도록 차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피해 줬다. 


… 


“ 그런데 그게 제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나요?” 


“ 네. 깊이 연관되어 있어요. 아이는 그곳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에서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의 자신이 있던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 지내 왔어요.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내면의 아이가 현실과 현재와 연결되지 않은 채 마음의 정원에 존재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손님은 늘 무언가 즉, 현재 혹은 현실과 몰입하며 연결될 수 있는 무언가를 기약 없이 찾아다녀야만 했던 거죠.” 


“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정원을 좋아하지만 청소년이던 시절부터는 늘 바쁘게 살았는걸요. 중학생 때 이사한 후 그 집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요” 


“ 사실 이건 의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몸의 어떤 느낌과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무언가를 찾아서 깊이 연결되고 싶다는 미묘하고 강력한 무의식적 느낌이 어디서 온 건지를 이야기이죠. 성장한 후 손님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어떤 직업과 작업을 몰입해서 하게 되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어떤 허한 느낌이 있었을 거예요.


어른으로 자란 손님은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능력과 주변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힘이 생겼지만 내면의 아이는 자신을 여전히 정원 속에 머문 상태에 두었기 때문에 손님이 아무리 현실에 존재하려고 수많은 직업이나 사업을 전전해도 늘 아니라고 느꼈던 이유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이가 정원에만 있음으로 실제 세계와의 단절이 가져온 공허함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일부인 내면의 아이가 그 정원에 머물러 있는 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현존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 허어…” 


“ 내면의 아이가 정원에만 머물게 된 건 세상을 의미 없다고, 소용없다고 보는 것 때문인데 아마 어떤 사업을 시작하실 때 의식적으로는 현실의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자신만이 느끼는 어떤 공허한 느낌이 있었을 거예요.  


내면에서 몸으로 오는 공허한 직감과 의식적으로는 사업적 현실에서 성공 같은 걸 이뤄야 한다는 이 두 가지의 다른 느낌이 중첩되는 느낌 같은 것 말이죠” 


  “ …” 


남자가 잠시 놀란 듯 보았지만 이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아까 말씀드렸지만 내 눈앞의 무언가를 본다는 건.. 판단을 하는 패턴, 즉 성격이라는 건 현재의 내가 눈앞의 상황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과거부터 누적되어 온 여러 명의 자신이 동시에 현재를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기 때나 아이일 때 세상에 대해서 느낀 무의식적 관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린 그들과 동시에 숨 쉬면서 살아가고 해석하고 있는 거니까요” 


남자는 꽤 오랜 시간 말이 없었다. 차를 마시면서도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건지 아니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벽뒤에서 듣고 있던 상혁은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남자가 홀연히 일어나 나가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저런 말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 자기 자신만 해도 그런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 그럼 이렇게 나이가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어린 시절이 그토록 영향을 주어왔다는 말씀인가요?” 


“ 네. 물론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나이나 인종을 떠나 누구나 그렇게 세상을 보고 느낍니다.”  

남자는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이유를 보고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그러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늘 이상하긴 했어요. 


내내 새롭게 시작할 때조차도 다른 사람들은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해주곤 했지만.. 그들도 제가 열심히 한다는 걸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만은.. 내 속 마음만은 서늘해져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면 마무리를 잘하지 못했어요. 마음속에 그 서늘함이 함께 있었거든요. 그러면서도 또 무언가를 찾았어요. 서늘함을 느끼지 않을 무언가를 만나길 바라며 찾았죠. 그리고는 다시 또다시. ‘ 이런 거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그게 그저 냉소적인 관점이라고만 생각했지.. 어린 시절이랑 연결은 시킬 수 없었는데.. 제 자신이 평생 왜 그랬는지 좀 더 큰 맥락에서는 이해가 될 수도 있겠군요.. “ 


이유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 그동안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서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매번 삶의 모든 이벤트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면 더욱더요. 그래서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 .. 지금에 와서 무의식을 아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꾸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  기억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만.. 다만 지금은 그 아기가 되셔야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