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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ODA Oct 15. 2024

네 번째 손님 3 - 내면의 아이


“ 그 이외에 생활하시면서 다른 특이점은 없었나요?” 


“ 특이점이라면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건지..” 


“ 뭐라고 설명드려야 하나.. 사업적인 면 말고 혹시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꼈던 느낌 같은 것. 그러니까 아주 미묘한 느낌인데 자신도 모르게 자주 빠져있는 몸의 상태 혹은 어떤 느낌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마다 다르지만 항상 각자 빠져있는 존재 상태가 있거든요.” 


남자는 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이유도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저도 매번 이 부분이 손님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워요. 음.. 일상생활의 다른 사건들에서 패턴을 갖고 있는 비슷한 느낌, 뉘앙스?이라고 할까요? 모든 부분에 걸쳐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근본의 느낌 같은.. 그러니까 결국 감각의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이유는 전달하기 모호하고 어려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설명은 점점 길어지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이유가 머리에 쥐가 나려던 찰나, 듣고만 있던 손님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혹시.. 이런 걸 말하는 건가요? 일상이라면.. 여가를 보낼 때에도 무언가를 미루고 놀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마음이 불편하고 불만이 있죠.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 느낌말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나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에도 주로 다른 생각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이게 아니라는. 무얼 찾아야 한다는..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진심으로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거의 없군요. 아내와도 그렇고.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그런 느낌으로만 지내고..


돌아보니 결국 어디를 가 있어도 무얼 하고 있어도 저는 거기에 없었네요. 나 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던 걸까요? 하아...” 


남자는 잠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사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은 인생을 산 게 아니라 무언가를 찾아서 헤매듯 계속 그런 몸과 마음의 상태에 있었다는 걸 방금 전 알게 것이다. 도대체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금 몹시 괴로웠다. 지나간 인생과 선택에 대한 후회와 함께.


“ 휴우~ 그거예요. 어떻게 잘 찾아내셨네요. ” 


손님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이유는 완벽하지는 않아도 잘 전달되었다는 느낌에 안도했다.


“ 그리곤 이상하리 만치 사업이 망하거나 무언가가 없어져도 감정의 동요가 별로 없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대범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했지만 그렇다기보다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미련이 없어서였습니다.”  


“ 실제로 동요가 없으셨던 게 맞나요?” 


“ 네. 당시엔 정말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사업이 망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곧 그런 마음마저 사라지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영향받지 않는 편입니다. ”  


“ 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느끼고 계시군요.” 


이유는 무언가 중요한 것에 대한 단서를 찾았을 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 우선 지금 드릴 수 있는 말은 손님이 쉽지 않은 걸 알아보셨다는 점입니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느낌을 스스로 인지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대부분 그저 쳇바퀴 돌듯 스스로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반복적으로 행동하며 살아가다가 인생이 마무리되곤 해요. 


손님은 몸이 습관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패턴을 스스로 찾아낸 거예요.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쉽지 않은 일 중 하나랍니다.” 





검은 실타래가 몇 차례 위로 올라가자 보이지 않던 파란색 전선이 나타났다.  이번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주인장이 눈빛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 인생의 이미지, 그러니까 표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이제 본 게임이야. 모든 생각의 근원. 최초의 기억과 반응을 만나야 해. 


이 세계관이 생긴 이유, 

내면의 아이 말이야” 


“ ... ” 


상혁은 사실 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에 다녀온 적도 만난 적도 있지만 그래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 그나저나 내면의 아이가 인간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만드는 근본 이유라고? 어떻게? 왜?’ 


바로 그때 자신들이 끈을 묶어 두었던 분노의 전선이 꿈틀꿈틀 굵어졌다 얇아졌다를 반복하면서 어떤 알갱이가 파이프를 지나가는 듯 보이자 주인장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제 간다” 


눈을 멀뚱이 뜨고서도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는 상혁은 그저 주인장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여러 곳의 어두운 공간을 지나 어떤 문이 나타났다. 이유가 어두움은 그가 자신을 생각하는 심연의 해석 방법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도착한 곳은 낡은 문 앞이었다. 


지중해풍 자연스러운 느낌의 나무문으로 실제 상혁이 언젠가 보았던 유럽 여행 영화 속에서 지친 주인공이 휴식을 위해 찾았던 그리스 주택의 느낌이 났다. 


두드렸지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유가 나무 위에 손을 대고 손님이 사인했던 카드의 문구를 중얼거리자 한참 시간을 끌듯 가만히 있던 문이 삐그덕 하고 열렸다. 


상혁은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밖의 암흑의 공간과 달리 안쪽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이국적이고 진귀한 온갖 나무들이 잘 관리되어 넝쿨과 자연스럽게 자연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린다.


가운데엔 일정한 크기의 돌로 턱을 만들고 흙을 가운데에 부어 만들어 놓았는지 커다랗고 둥그런 화단이 있었고 안쪽은 갖가지 색깔의 꽃들이 피어있다. 멀리 정원의 바깥쪽은 일 년 내내 푸르른 나무들이 마치 바깥의 외부세계로부터 무언가 소중한 것을 보호하듯 빙 둘러 빽빽하게 서 있었다. 


‘ 이건 마치 비밀의 화원 같잖아?’ 


“ 여기 주인이 문은 열어줬지만..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영역이야.  마음의 문을 닫으면 더 힘들어지니까 ” 


상혁은 주의해야 한다는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 이번엔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되는 거지?’


양쪽으로 나무가 빽빽이 정리된 돌길을 꽤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중앙의 알록달록 꽃들이 있는 곳에서 약간 비껴 나 있는 의자에 어떤 어린아이가 앉아 있다. 이곳을 지키고 나무를 가꾸는 누군가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 아이.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정원에 있는 꽃들이나 나무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듯 조잘거리는 중이었다. 이유와 상혁이 다가가자 꼬마는 동요하는 나무와 꽃들에게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펼쳐 살포시 누르는 동작을 했다. 


“ 안녕? “  

“ 응..” 


“ 혹시 놀라진 않았니?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서 말이야” 

“.. 여긴 어떻게 왔어?” 


아이는 자신을 찾아온 낯선 이들이 탐탁지 않은 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 부탁을 받아서 오게 됐어.” 

“ 부탁? 여긴 내가 있는 곳인데..”  


꼬마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낯선 이들의 방문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결국 벤치에 앉아 이내 입술을 앙다문다. 


“ 너 혼자 지내는 거야?” 

“ 혼자이지만 사실 혼자는 아니야. 나무와 꽃들이 있으니까.” 

“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 오랜만이야..” 

“ 너도 정원을 좋아해?” 

“ 응. 아주 좋아해. 사실 우린 여행 중이야. 그리고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여기까지 왔어..” 

“ .. 여긴 아무도 모르는데..” 

“ 누군가.. 너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부탁했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 


왠지 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낀 상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조마조마하며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 누군지 왜 그런 걸 부탁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아주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꽃들과 나무들과 함께” 

“ 그래. 그래 보여.. 아무도 이곳에 네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너 자신도, 부모님들도 말이야.” 

“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들은 이곳 어디에도 없어.”


그러다 갑자기 정원의 날씨가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잠시 지나자 다시 눈부신 햇살이 돌아왔다. 


상혁은 어째서 이곳이 최초의 세계관을 만드는 곳인지 또 윗 층인 6층의 인생의 표상을 만들어 내는지 여전히 알수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아이는 잘 지내는 게 확인되었으니 주인장에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순간인 것만은 분명했다. 한 동안 아이가 토라진듯 아무런 반응이 없자 걱정이 된 상혁은 주인장에게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 했다. 주인장이 지금은 아니라는 상혁과 약간의 말다툼이 일어난 듯 하자, 순간 갑자기 아름답던 정원은 깜빡깜빡거리더니 사라지고 그 자리엔 거대하고 사방으로 둘러쳐진 회색 벽이 나타났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갇히게 될게 분명했다.


그 아이는 이번에 뒤돌아서 벽을 보고 웅크려 앉은 채로 그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또 싸우는군.. 엄마 아빠는 매번 이렇게 싸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야” 


아이는 그 말을 반복해서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가 앉아 있는 곳에서 파란색 분노의 전선이 파랗다 못해 진한 쪽빛이 되었다가 다시 회색이 되었다가 혹은 파란색으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꿈틀대며 색깔이 바뀌었다. 


“ 지금이야. 내면의 아이가 느끼고 있는 최초의 기억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있어. 아이와 이야기 나눌 거야. 이건 실습이니까 확실히 봐두어야 해” 


이유는 상혁에게 속삭이듯 마저 이야기하고 아이가 앉아 있는 벤치로 가 앉았다.


“ 부모님이 자주 다투었던 거야?” 


웅크리고 팔을 꼬아 머리까지 처박고 있던 아이는 순간 고개를 들어 이유를 바라보더니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


“.. 엄마 아빠는 매번 큰 소리를 지르며 다퉜어.. 내가 아주 아주 아기일 때부터. 나는 말도 못 하는데..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어” 


“ 저런 세상이 온통 시끄럽고 혼란스럽다고 느꼈겠구나” 


“ 나는 그들이 평화롭기를 바랐어. 그들을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듣지 않았어.. 내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아..”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이유는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건지 공감하는 건지 모르게 같은 말을 읊조렸다.


“ 그렇구나 네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구나..” 


“ 그래.. 내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곳에 그들 곁을 떠나 이곳으로 왔어. 내가 좋아하는 꽃밭으로..” 


“ 이곳의 나무랑 꽃들이 정말 싱싱하고 아름다워.” 


“ 나무랑 꽃들과 있으면 난 그대로 있을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잊고,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 편안한 상태로 말이야.” 


“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정원이라..”


“ 그래. 이곳에선 엄마, 아빠가 있던 곳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정원이 사라지고 벽이 나타나 당황하고 있는 상혁에게 다가갔다. 


“ 아이는 사랑하는 부모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음을.. 분쟁을 그만두도록 할 수 없음을.. 그 엄청난 좌절을 자신 탓으로 돌린 거야” 


벽 속에 영원히 갇히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상혁은 더 이상 무얼 해야 하는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유는 상혁을 진정시키듯 조용히 말했다. 


“ .. 아이가 말하고 있는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최초의 기억이란 거야. 아주 어린 아기의 몸의 느낌, 이 관점이 한 인간이 살아가는 전체의 세계관을 만드는 씨앗이 된 된거야.” 


상혁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은 중년이 된 이 남자가 말했던 내용 중에 지독할 만큼  현실과 괴리되거나 만족할 수 없다고 했던 남자의 판단이나 행동들이 생각났다. 


“ 그럼 부모들이 갈등하고 다투는 상황이 아직 말도 못 배운 어린 아기인 자신 때문이라고 해석했다는 거예요?”  


“ 그래. 맞아. 아기는 온몸을 다해 계속 외쳤지만 세상은 전혀 변화가 없었으니까. 그 상황을 자신을 그 세계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어서라고 해석해 버린 거야. 자연스럽게 아기는 스스로 세상을 그렇게 이해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거고. 성인인 우리들도 어떻게든 상황을 해석해야 뭔가 조치를 취하잖아.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 말이야.” 


“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잖아요.” 

“ 그래. 아기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같은 부모에 대해서 해석하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니까. 이 아기는 그런 거고” 


“ 그럼.. 다음 단계가 정원이었던 이유는요?” 

“ 그건 부모라는 현실의 세계를 떠나서 주변에 보이는 다른 무언가로 주의를 옮기기로 한 거지. 자신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중요하지 않아도 심적 부담이 없는 세계로.. 갈등이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세계로” 


상혁은 사실 말문이 막혔다. 정말 저 아이가 시끄럽고 다툼이 많은 현실을 떠나 완벽히 정원에 머물기를 선택했으므로 일어난 파급력이 중년을 넘은 그 남자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건가?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이 나름의 세계를 해석하다니 그게 가능한가? 그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일 텐데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 감수성을 완전한 아기 일 때 결정해 버린다는 건가?


" 이제 중요한 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거야. 다른 관점이 있다는 가능성을.. 잘 봐둬" 


상혁이 황당해서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는 동안 이유는 좀 진정된 아이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하는 말이 소용이 없었던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다툴 때는 다른 어른들이 와서 말렸어도 전혀 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걸 이야기해 주러 왔어. 아마 무서운 경찰아저씨가 왔어도 부모님은 말도 안 듣고 계속 싸웠을 거야.”


“ …” 


아이가 이상한 말을 하는 여자라는 듯 다시 올려다봤을 때 기회를 포착한 듯 주인장이 더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 네가 그때 느꼈던 ‘ 내가 말하는 건 아무도 안 들어’는 ‘ 다 큰 사람들도 싸울 때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구나’가 더 맞을 거야. 네 말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견 차이로 다툼이 클 때에는 정말로 전혀 듣지 못하거든. 


그때 네가 느낀 그 해석은 사실 어리고 사랑이 많은 너만이 낼 수 있는 결론이었어. 당연해. 그때의 넌 겨우 1~2살 먹은 아기였는 걸. 그들이 귀가 있어도 전혀 듣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것만은 알아줘. 네 잘못이 아니야.” 


아이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 이유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 그게 정말이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 응. 그들은 완전히 싸움에 몰입되어 있는 상태니까.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게 되거든. 그러면 주변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돼. 네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봐. 난 내가 약하고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또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 그때 엄마 아빠가 싸우는 상황은 너무나 큰 슬픔과 당황스러움이었다는 걸 알아. 그래서 어떻게든 네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거고.. 


그런데 그들의 상태를 몰랐던 너는 온몸으로 결론을 내어버렸던 거야. 이후 더 이상 그 싸움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없어서 아예 너만의 정원을 만들고 들어가 꼭꼭 문을 걸어 잠근 것도 이해가 돼” 


“ 그건… ” 


아이가 이해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유는 차분이 비슷한 설명을 조금은 돌려서 반복해 집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다르게 해석되는지 알려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 아직 잘 모르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지. 사실 난 그날 이후론 정원에서 한 발도 나가지 않았어. 그냥 그 모든 것들을 해봐야 소용없다고 느꼈었거든..” 


“ 아직은 어색할 거야.. 네가 무력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약간은 걸릴 거고.”


“.. 그래도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건 처음 느껴보니까.." 


“ 그래 여태까지 세상을 느껴 온 가장 근본의 이유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어서 낯설 거야. 그건 당연해. 자연스러운 일이고..


" 내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갑자기 좀 이상해.” 


" 앗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아직 초보인 내 조수가 익숙하지 않거든. 정원을 구경시켜 줘서 고마웠어.” 


“ 응. 그런데 그게 누구야? 나한테 가보라고 한 사람 말이야” 


“그건 다음에 또 놀러 와서 이야기해 줘도 될까? 지금으로도 충분히 생각이 많을 테니까” 


대신 이유는 아이에게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내밀었다. 아이도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이유의 손가락에 걸고는 빙긋 웃었다. 다시 밖으로 돌아온 시간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분명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을 봤고 꽤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서재에 머물렀던 총시간은 두 시간 남짓.. 


“ 파하.. 아.. 전 잠시만요. 커피를 안 마시고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없다고요” 


카페로 간 상혁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정신을 차려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지금 시간에 연거푸 두잔째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무엇보다도 그 손님의 다른 에피소드들이야 실감 나는 영화의 장면들로 볼 수 있다 치겠지만 마지막에 그 꼬마를 만났을 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던 걸 상기하느라 집중하는 중이었다. 


“ 그게 뭐였지..” 


그건 마치 시점이 바뀐듯한 실시간 영상을 아이의 입장에서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통은 완전한 타인이 되어 바라보는데 주인장이 아이와 이야기하는 그 순간은 달랐다. 마치 다투는 거대한 부모들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아이의 기분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파란색 전선 때문인가?


‘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 


독백이 머릿속을 돌고 돌아 최초로 분노와 함께 튀어나왔을 때의 느낌은 곧장 힘이 빠지고 움츠려드는 몸의 기분이 함께 왔었다. 아니 오히려 몸의 느낌을 언어로 풀었다는 쪽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들이 떠오르고 나서는 아기 자신이 무력함과 무기력함을 깊이 느끼며 좌절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 아이들, 아니 그런 쪼그만 아기들이 이런 걸 느낀단 말인가.. 너무나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정말이잖아. 아기들이 태어나면 부모를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한다면.. 그럼 그 손님은 세상을 향해 체념하고 있었단 건가?  


노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미 시작도 하기 전부터 아기 때 바라보던 그대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내내 꽤 열심히 살아온 거지?  


최초의 기억, 아이 때 갖고 있는 기억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건가. 그럼 아이 때 기억이라 이젠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거? 프로그래밍, 세팅이 되어있는 관점을 바꾼다는?’ 


끝도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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