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이 금리를 내려도 원화 환율은 요지부동인가?
미국 연준(Fed)이 12월 금리 인하를 단행했지만, 원·달러 환율은 여전히 1,500원 선을 위협하고 있다. 교과서대로라면 환율이 떨어져야 할 시점에 왜 이런 '발작'이 일어나는가? 금융당국은 그 원인을 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 이른바 '서학개미' 탓으로 돌리려 한다. 하지만 이는 현상과 본질을 뒤바꾼 책임 전가다.
지금의 고환율 위기는 ‘매력 없는 한국 증시(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자초한 자본 유출과 ‘한국은행의 변칙적인 양적 완화’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펀더멘털이 무너진 상황에서 국민연금을 동원한 환율 방어나 개인 투자자 비난은 미봉책일 뿐이다.
이자율 평형 이론의 붕괴와 정책의 딜레마
전통적인 국제금융 이론인 이자율 평형 이론(Interest Rate Parity)에 따르면,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금리 인하는 달러화의 약세와 신흥국 통화의 강세를 유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2025년 12월, 미 연준(Fed)의 금리 인하 단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1,500원 선을 위협하는 이례적인 디커플링(Decoupling)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현재의 환율 상승이 단순한 내외 금리 차에 기인한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아님을 시사한다.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고환율의 본질은 실물 부문의 경쟁력 약화와 금융당국의 도덕적 해이가 초래한 통화 정책의 신뢰성 상실이 결합된 구조적 위기다. 1997년 외환위기가 외부 충격에 의한 유동성 위기였다면, 현재는 내부 시스템의 괴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서학개미 책임론'의 허구: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책임 전가
최근 금융 당국 일각에서는 환율 급등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개인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투자, 이른바 '서학개미'의 달러 매수를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상의 결과를 원인으로 오독하는 전형적인 책임 전가이자, 정책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논리다.
서학개미들이 한국 주식을 팔고 미국 주식을 사는 것은 비애국적인 행위가 아니다. 자본 자산 가격 결정 모형(CAPM)의 관점에서 볼 때, 리스크 대비 기대 수익률이 현저히 낮은 한국 시장을 떠나 더 높은 수익과 주주 환원을 보장하는 미국 시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경제 주체의 지극히 합리적 선택이다.
지난 10년간 코스피는 '박스피'라는 오명 속에 갇혀 있었고, 기업들은 물적 분할(쪼개기 상장)과 낮은 배당 성향으로 주주 가치를 끊임없이 훼손해왔다. 반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통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한다. 즉, 자본 유출의 진짜 원인은 서학개미의 '달러 사랑'이 아니라, 투자할수록 손해를 보는 '한국 시장의 매력 부재'다.
당국이 서학개미를 탓하는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펀더멘털 약화를 가리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과거처럼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가 자본수지 적자를 상쇄하던 공식은 깨졌다.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산업의 수출 경쟁력은 약화되었고, 중국의 기술 추격으로 무역 수지의 질은 나빠졌다. 이러한 산업 구조적 위기와 거버넌스 개혁 실패라는 본질적 원인은 외면한 채, 더 나은 시장을 찾아 떠나는 투자자들에게 환율 상승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통화 정책의 일탈:
'스텔스 양적완화'와 중앙은행의 도덕적 해이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의 가장 치명적인 뇌관은 한국은행의 정책적 비일관성이다. 한국은행은 표면적으로는 물가 안정을 위해 기준금리를 긴축적인 수준으로 유지한다고 공언하지만, 실제 금융 시장에서는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책적 미스가 아닌,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신뢰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일탈 행위다.
한국은행의 가장 문제적인 행보는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의 기형적 운용이다. 본래 중앙은행의 RP 매입은 일시적인 자금 부족이나 명절 등 특수 시기에 단기 유동성을 공급하고 빠지는 '미세 조정(Fine Tuning)' 수단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은행은 만기가 돌아온 RP를 회수하지 않고 무한정 재매입(Roll-over)해 주는 방식을 통해, 사실상 시장에 돈을 영구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이는 공식적인 기준금리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뒷문으로 돈을 푸는 '스텔스 양적완화(Stealth QE)'다. 미국의 연준(Fed)이 위기 시 공식 선언을 통해 투명하게 자산을 매입하는 양적완화와 달리, 한국은행의 방식은 긴축을 가장한 부양책이라는 점에서 시장에 혼란을 준다. "금리는 높은데 돈은 흔한" 기현상이 발생하며, 이는 화폐의 희소성을 떨어뜨려 원화 가치 급락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고전적 역할은 위기 시 건전한 자산 담보를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최종 대부자'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행은 부실이 확정적인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사업장과 유동성 위기에 처한 제2금융권(새마을금고, 증권사 등)이 발행한 채권을 직간접적으로 받아주며 그들의 수명을 연장해주고 있다.
이는 중앙은행이 시장 원리에 따라 도태되어야 할 부실 기업을 국민의 화폐 가치를 희석시켜 살려내는 행위다. 이러한 '선별적 구제'는 시장에 "어떤 부실을 저질러도 중앙은행이 막아준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주어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한국은행은 최종 대부자가 아니라, 좀비 기업의 파산을 막는 '최종 구조조정 저지자'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시장의 보복:
신뢰 상실과 구축 효과의 역습
한국은행이 이처럼 '앞에서는 긴축, 뒤에서는 부양'이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 대가는 가혹하다. 시장은 정책 당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통화 정책의 핵심 자산은 신뢰다.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부실 막기에 급급해 돈을 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해당 통화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의 경상수지나 금리 차보다 더 심각하게 보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은행은 원화 가치를 지킬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글로벌 자본은 원화를 투매하고 있으며, 이것이 1,500원 환율 위협의 본질적인 심리 기제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도 시중 금리가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정부와 한은이 쏟아낸 채권 물량과 신용 리스크 때문이다. 한은이 유동성을 공급해 부실 채권을 떠받치는 동안, 건전한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해야 할 회사채 시장은 자금을 빨리지면서 ‘구축 효과(Crowding-out Effect)’가 발생한다.
더욱이 시장은 한은의 무리한 돈 풀기가 결국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라 예상하고, 채권 금리에 기대 인플레이션과 '정책 불확실성 프리미엄'을 얹고 있다. 돈을 풀수록 시장 금리가 튀어 오르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한국은행이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투기 자본의 먹잇감이 된 '흔들면 흔들리는 나라'
더욱 뼈아픈 현실은 1,500원이라는 환율이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을 반영한 것을 넘어, 국제 투기 자본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환율 결정의 80% 이상은 국내 시장이 아닌 싱가포르와 홍콩의 역외 선물환 시장(NDF)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투기 세력에게 한미 금리 역전이나 무역 적자는 이미 가격에 반영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원화 약세에 베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 경제가 추세적으로 꺾였다고 판단하고, "오르는 쪽에 돈을 건다"는 투기적 심리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웩더독(Wag the Dog)' 현상으로, 과도하게 절하된 환율(Overshooting)이 거꾸로 한국 경제가 망가졌다는 신호로 해석되어 다시 환율을 끌어올리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투기 자본이 하필 한국을 타겟으로 삼은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이 경제 규모에 비해 내수 기반이 기형적으로 취약한, "흔들면 흔들리는 나라"라는 약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수출 비중이 높아도 거대한 내수 시장이 완충 역할을 하는 독일 등의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수출이 삐끗하거나 환율 공격을 받으면 경제 전체가 휘청거리는 구조다. 딜러들은 한국 경제에 '안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따라서 지금의 환율 밴드가 과거 1,100원대에서 1,400원대로 이동한 것은, 단순한 화폐 가치의 하락을 넘어 한국 경제의 '국격' 자체가 강등되었음을 의미하는 시장의 냉혹한 성적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할 정책 당국의 무능은 사태를 키운 기폭제였다.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 관료들(이른바 F4)은 시장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정교한 '언어적 교정‘을 보여주기는커녕, 오락가락하는 메시지로 불확실성만 가중시켰다. 국민연금 동원설을 흘렸다가 번복하고, 독립성을 지켜야 할 한국은행 총재가 정부와 밀착해 움직이는 모습은 시장에 "한국은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확신만 심어주었다. 관료들의 엘리트 카르텔이 밀실에서 내놓은 설익은 대책들은 고수들이 즐비한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 아마추어적 대응에 불과했다.
결국 지금의 고환율은 한국 시장의 매력 부재(내부 요인)와 정책 실패(정책 요인), 그리고 이를 틈탄 투기 자본의 공격(외부 요인)이 만들어낸 '삼각 파도'다. 투기 세력은 한국 정부가 어떤 미봉책을 써도 펀더멘털이 개선되지 않는 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더 이상은 위험해서 못 밀어붙이겠다"고 느낄 만큼의 강력한 구조 개혁과 내수 강화, 그리고 통화 정책의 독립성 회복 없이는, 우리는 투기 자본이 정해주는 환율 1,500원 시대를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좀비 기업의 연명과 '창조적 파괴'의 지연
실물 경제 측면에서는 슘페터가 역설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멈췄다. 금융 당국과 한은이 합작하여 부실 차주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관행을 지속함에 따라,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좀비 기업들이 생존하여 한정된 자본과 노동을 잠식하고 있다. 이는 국가 전체의 총요소생산성(TFP)을 떨어뜨리고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주원인이다. 자본이 한국을 떠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 '혁신 없는 연명'과 '비효율의 누적'에 있다.
우리나라의 과도한 자영업자 비율과 외부충격의 취약성, 내수시장 침체를 고려한 소상공인 배드뱅크 설립에는 위선적인 혈세 낭비라고 쌍심지를 켜고 분노하며 ‘폐업후 재창업’과 창조적 파괴, 구조적 변화를 노래하던 경제지들은 이 상황에 대해 뭐라고 보고 있는가. ‘기업이 망하면 모두 줄도산 우려, 모든 근로자가 실업자가 되고 나라가 망하니 일단 국가가 살려내라’라며 이 기형적인 구조를 떠받들라고만 하고 있지 않은가?
대외 환경의 변화:
미국 금리 인하의 이중적 함의
현재 단행된 미국의 금리 인하는 한국 경제에 '산소호흡기'일 수는 있어도 '치료제'는 아니다. 미 연준의 인하는 경기 침체 방어적 성격이 강하므로,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실물 경기의 하방 압력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독자적인 통화 정책, 환율 안정,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라는 '불가능한 삼위일체‘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미국의 인하를 틈타 구조조정 없이 또다시 빚을 내어 경기를 부양하려 한다면, 머지않아 1,500원 환율이 '뉴노멀'이 되는 식물 경제로 전락할 것이다.
고통 없는 구원은 없다, '정공법'만이 살 길이다
현재의 위기는 외부의 파도가 아니라, 내부의 배가 깨져서 생기는 침몰이다. 국민연금을 동원한 인위적 환율 방어나, '서학개미'를 탓하는 여론전은 위기의 본질을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금융당국은 지금이라도 '남탓'과 '꼼수'를 멈추고 고통스러운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첫째, 한국은행은 '스텔스 양적완화'를 즉각 중단하고, 원칙적인 통화 운용을 통해 시장의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둘째, 한계 기업과 부실 PF 사업장에 대한 옥석 가리기를 시작하여,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투자자를 탓하기 전에, 기업 거버넌스 개혁을 통해 한국 증시를 '떠나고 싶지 않은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 유출을 막는 유일한 해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달콤한 희망 고문이 아니다. 뼈를 깎는 개혁 없이는 1,500원 환율이 '뉴노멀'이 되는 식물 경제의 미래를 피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