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떼굴 Jan 25. 2024

이해해요 엄마

프롤로그

딸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행동 때문에 내 속이 뭉개질 때 끓어오른 화를 가라앉히고 엄마를 소환한다. 나는 엄마에게 어떤 딸이었는지를 잠시만 떠올리면 서운함은 어느새 미안함으로 바뀌는 마술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노화의 시계로 진입했다. 젊은 날의 아우성은 멋진 노년을 기대한 욕망의 긴 준비태세가 아니었나 싶다. 주변인을 벤치마킹하며 나를 재구성하기 위해 전환을 반복해 온 삶. 과정은 시끄러웠으나 끝은 고요한 삶. 미련 따위 남김없이 궁극의 마무리를 위해 변환을 반복했던 나의 전반생에 가장 많이 참고한 모델은 친정 엄마다. 엄마의 시간을 관찰하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과 각오를 매일 새롭게 새겨 넣었던 날들. 젊을 때는 엄마보다 더 높은 자존감으로 살려했고 중년 이후는 엄마보다 더 나은 품위로 늙고 싶었다.


삶의 후반생으로 진입한 나의 시계 어느 날, 내 딸 눈에 비친, 그래서 딸에게 단정 돼버린 내 처신의 단편처럼 친정 엄마의 단편을 저장한 내 기억도 어쩌면, 왜곡의 일부이거나 사실과 거리가 먼 대부분일 수 있다는 자각과 마주했다. 


엄마와 영영 이별 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온다. 딸과 함께 한 시간을 펼쳐 깨달은 진실처럼, 엄마가 기록된 내 기억 속 숨바꼭질을 끝내고 싶다. 술래가 된 나는 내밀한 곳에 꼭꼭 숨겨진 기억의 왜곡을 찾아 나설 것이다. 구부러진 것을 펴 딸과 화해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진심으로 이해받은 엄마를 천국문 앞에서 배웅하고 싶다.    


누군가를 향한 온전한 이해는 말처럼 쉽지 않다. 대상이 가족일 때는 더 그러하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인지 부조화는 가족문제를 만나면 대기한 서운함이 용수철처럼 먼저 튀어나온다. 내가 흔하게 겪는 감정이다.


친정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던 건 엄마 전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엄마를 통해 체화하고 습득한 결과를 기본에 두지만 미련 없을 때까지 삶의 태도를 갈아 끼우고 싶다는 수용과 포용의 의지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엄마는 그걸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