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한 줄도 모르고 살았던 몇 년 간의 시간이 있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때의 '주체성'이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언가를 잘할 수 있고 이 세계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기능할 때' 느끼는 '유능감'이 필수적이다. 거기에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느끼는 '연결감'을 느낄 수 있어야 사회적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이것들을 느끼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면 인간은 금방 좌절하고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우울한 이유도 이러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동경하며 꿈꿀 적에는 몰랐던 현실이었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 자신이 너무 작고 못나보였다. 직장 밖에서 나의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 이 직업의 특수함 때문에 이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나는 꽤 자주, ‘어쩔 수 없이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 나은 것인지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내가 나의 의지로 죽는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기 때문에 자의가 아닌, 어떤 사건 ‘어쩔 수 없이’ 생긴다면 오히려 좋겠다는 비밀스러운 생각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았기에 계속 억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먹다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날로 병원에 찾아가 우울증 치료를 받고 난 후부터는 확실히 빈도가 줄어든 생각이긴 하지만, 언제나 은은하게 내 생활 전반에 깔려있던 생각이기에 종종 관성이 마음을 끌어당기게 내버려 두어서 그 음침한 마음에서 익숙함과 편안함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산을 오를 때는 그렇지 않다. 마음의 관성은 나를 걷기보다는 앉아있게 하고, 앉아있게 하기보다는 누워있게 하고, 깨어있게 하기보다는 잠들게 했다. 그러나 산에 가기로 약속한 날에는 나는 몸을 일으켜 깨어난다. 중력에 이끌리기보다는 거슬러 오르기를 택한다. 자꾸만 삶에서 멀어지고픈 마음은 어느새 잊는다. 산밑으로 돌아가서 편하게 있고 싶은 나를 이겨내려 하고, 위로 위로 향해 올라갈 에너지를 만들어 보려 한다. 신기한 일이다.
등산을 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죽고 싶음에 대한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