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
아들 녀석을 학교 교문까지 바래다주는데, 교문을 지키는 문지기 아이 둘이 “좋은 하루 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며 율동까지 곁들이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교사가 시켜서 하는 일이겠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 아이들을 보니 어둡게만 여겨지던 세상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비록 남편이 시한부 인생으로 병원에 누워 있지만, 아직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가 되었다. 아프든 아프지 않든, 우리는 둘 다 삶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병원과 집만 오가던 나에게 잠깐이나마 딴 세상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너희들이 인사를 해 줘서 아줌마한테 진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심장이 쿵 울리도록 크게 외치며 아이들의 인사에 그렇게 답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간병인 아줌마가 남편이 한밤중에 열이 올라 고생을 했다고 전했다. 폐렴이 왔다고 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얼음찜질을 하느라 환자도 아줌마도 잠을 거의 못 잔 모양이었다. 아침이 돼도 열은 가라앉지 않아 간호사가 해열주사를 놓고 갔다. 나는 남편의 겨드랑이에 얼음주머니를 넣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며 시간을 보냈다. 담당 의사는 계속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중환자실로 내려 보내야 한다며, 그때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폐렴으로 사람이 간다는 말이었다. 전에는 발작이더니 이번에는 폐렴이다. 마음은 무겁고 심란했다.
오후에 이권우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을 보러오겠다고 했다. 남편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다음으로 미뤄 달라 했지만, 꼭 남편만을 보러 오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남편의 책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출판 건으로 연암서가 권오상 선생님을 동행해서 온다는 것이었다. 더는 말릴 이유가 없어 병원으로 오시라 했다. 이권우 선생님은 남편을 통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눠 친숙했고, 권오상 선생님은 처음 뵙는 자리였으나 선량한 인상 덕에 낯설지 않았다. 출판 계약에 대해 설명을 듣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통장 번호를 적었다. 병실까지 멀리서 찾아와 준 그분들의 발걸음이 고마웠다.
저녁부터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분들이 떠날 즈음 창밖으로 함박눈이 벚꽃처럼 흩날렸다. 봄눈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고 하지만, 오늘의 눈은 달리 보였다. 눈송이가 흩날리는 그 순간, 서설(瑞雪)이라 여겨졌다. 아니, 서설이기를 바랐다. 남편의 책이 이 눈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흩날려 오래 남기를, 그래서 남편의 삶 또한 기억 속에서 꺼지지 않기를 바랐다.
(당신이 떠나기 전 3월 하순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