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쓰는 건 아는데 왜 치트키가 안 될까?
잘 쓰면 치트키! 아무때나 날리면 독!
"김대리! 저번에 얘기한 정기예금 실적 다 나왔어?"
"네? 아..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단 모른다는 얘기다. 모르지만 알아오겠다는 의지를 함께 포함한다. 직장인들에게는 하루에 수십 번도 말하고 듣게 되는 최애 표현 중 하나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뭘까?
첫째, 모르고 있다는 것을 대놓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어기제가 된다. 둘째, 모른다는 무지. 원하는 바를 알아다 주겠다는 의지. 이 두 가지를 세련되게 한방에 포장해 버린다.
주로 누군가 업무 진행사항을 물어봤을 때, 모른다는 것에서 올 수 있는 후한을 미리 상쇄하는 오피서들의 타협 스킬이다. 모른다고 하면 모자라 보일테고, 알아야지 왜 모르냐 딜이 날라올 것이 뻔하다. 원리는 얻어맞기 전 잠시 <Pause> 버튼을 딱 누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알아온 다음에 다시 <Play> 버튼을 누르는 식이다.
여기서 핵심 포인트가 있다. 확인하겠다는 표현은 시간제한을 함께 가진다. 일시정지 버튼이 해제되기 전에 클리어 해야한다는 뜻이다. 정지 시간이 언제 풀릴지는 물어본 사람이 누구냐에 달라진다. 폭탄이 터지기 전에, 여기저기 알아보고 원하는 것을 알려주어야 클리어가 된다. 정지 눌렀다고 안심하고 다른거 하다 까먹으면, 폭탄은 언제 어떻게 터지게 될 지 모른다.
이 표현의 사용법을 보면 대답하는 뽄새만 봐도 그 사람의 유형이 딱 보인다. 만약 관리자라면 누가 착한 애고 나쁜 애인지 유심히 살펴보자.
질문) 지난 주에 수출 영업 실적이 얼마나 나왔나요?
1. 잘 아는 넘 : 전체 수출액 100$, 전주보다 35% 증가한 수치고, 대부분 북미에서 늘었죠. 맞는지 확인해 드려요?
2. 쫌 아는 넘 : 전체 수출액100$로 꽤 늘어난 거로 알고 있는데.. 세부 내용은 좀 확인해 보겠습니다.
3. 아는척 하는 넘 : 토털 어마운트가 70불인가 80불인가 그쯤이었던거 같고, 환차손도 좀 있는거 같던데..결과 좀 확인해 보겠습니다.
4. 모르는데 약은 넘 : 안 그래도 어제 확인했었는데 재무팀에서 제대로 안 알려줘서요.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5. 모르고 순수한 넘 : 아.. 이건 제가 잘 모르는 거네요. 저도 확인을 해 봐야 알 수 있어요.
6. 아는데 모르고 싶은 넘 : 100$ 정도였나? 제가 휴가라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재무팀에 확인해 보세요.
7. 그냥 모르고 싶은 넘 : 네?? 이거 저 아닌데요?
8. 알았는데 억울한 넘 : 엇? 자료까지 만들어 놨는데 어디 갔지.. 확인해서 알려드릴께요!
9. 리액션에 절여진 넘 :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전화해서) 제가 어제도 물어보지 않았나요? 수출 실적 바로 좀 확인해 주세욧!!
10. 능구렁이 휘감은 넘 : 아 그거요? 이런 건 제가 또 바로 확인해서 알려 드려야죠! 또 다른 건 없으세요? 하하하핫!!
이와 함께 각광받는 오피서들의 방어 기술이 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게 되는 일종의 치트키 같은 광역 방어 스킬이다.
할게 많아서 시간이 많이 필요한 상황. 위에서 시키는데 잘 모르겠거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던가, 생각 좀 해보고 할지말지 각을 재야 하거나, 즉답을 피하고 싶거나, 하기 싫은데 핑계거리가 없거나, 음.. 뭐 그냥 생각이 없다 싶을 때..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위기 모면용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맞다. 결국 그냥 다 하기 싫다는 소리다. 대놓고 싫다고 말하면 까이니까, 한바퀴 돌린 것이다. 저 말을 할 때는 보통 일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상사가 일을 시키거나, 다른 부서에서 업무 요청이 오거나, 거래처에서 일을 요청하거나 할 때 자주 볼 수 있다.
그럼 왜 검토하겠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냐?? 모든 직장인의 공통점은 일거리를 받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근데 대놓고 못하겠다고 하면? 혼나고 털리다가 평가 나락간다. 딴데서 처리 안해준다고 잡소리 징징 나온다.
그래서 일단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러고 묵혀둔다. 누가 와서 "그때 그거 어떻게 됐냐?", "왜 아직 안했냐?" 물어보면, "검토 중입니다!" 이런다. 안 한다고 한게 아니다. 그래서 일단 방어가 되는 원리다.
검토라는 건 말 그대로 그 사안에 대해 생각해보고 방법이나 득실도 따져보는 것이다. 이 검토라는게 눈으로 보여지는 실체가 없다보니 상대방은 답답하겠지만, 하고 있는 것처럼 둘러대기 좋다.
만약 위에서 자꾸 "언제 되느냐?" "어디까지 검토했냐?" "내일은 되냐? 모레는 되냐?" 피곤하게 체크 들어와서 해야될 각이다 싶으면, 검토 중이라고 간 보다가 그때부터 하는 거다. "아..쫌..그냥 넘어가지..기억력 오지넴.." 하면서.
사실 검토하겠다고 하면 안하는게 대부분이다. "계속 검토 중이다.." 이러고 몇 번 둘러치면 상대가 까먹거나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검토해 보겠습니다."는 매우 선호도 높고 대중적으로 사랑받는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를 막론한다. 공공 민간 따지지 않는다. 지위고하, 남여노소, 세대의 차이를 초월한다. 즉, 아주 매우 베리 머치 쓰임새가 많은 광대역 표현이다.
근데 이 검토의 뉘앙스가 미묘해질 때가 있다. 만약 상대와 얘기를 하다 검토 소리가 나온다면, 잘 신경써서 들어야 헛발질을 안 한다. 써먹는 이도 맞춰서 하기 바란다.
1.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 신경은 좀 써 드릴께!
이 케이스는 많이 윗사람(?)이 시킨거라 하긴 해야할 것 같고, 나중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신경 쓴 티를 많이 내야 된다.. 이럴 때 쓰인다. 가령 승진이 걸려 있다. 또는 후한이 두렵다. 이런 경우다. 때에 따라 친한 이웃팀 사람이 요청하거나 할 때도 신경 써 줘야 한다. 즉, 상대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일 때라고 보면 된다. 그 외에도 될 만한 일인 것 같다. 몇 가지만 따져보면 간단할 것 같다. 근데 확신하기 이르다.. 싶은 경우도 있다. 어쨌든 어케저케 되는 시늉이라도 나오겠구나 하면 된다.
2. 검토는 해 보겠습니다만.. = 꿈 깨라!
아마 이 케이스는 앞의 대화가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해줘! 해줘! 해달라고!" 이러고 징징거리니까 그냥 마지 못해 하는 말이다. 저 정도면 상대가 막무가내거나 속이 타들어가는 상태일 것이다. 뭐라도 잡고 싶을덴데, 거기다 대고 "싫어! 싫어! 싫다구!" 이러면 개싸움 난다. 쌈나면 사람들은 불구경 쌈구경 좋아하니까 몰려든다. 그럼 그 풍파에 휘말린 나는 그렇게 바보 찐따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회피용으로 말하는 거다.
"검토는 해 보겠습니다만..." : 이 '...'의 여운이 중요하다. 왜 시원하게 얘길 안 하는 것일까? 저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가?
"검토는 한번 해 볼께요." : 여기선 ‘한번‘ 이 지점이 중요하다. 두번도 아니고 한번만 한대. 그냥 검토한다고 하지 왜 한번이라고 횟수를 정하는 것일까?
어쨌든 뭐 이런 형태가 되는 거다. 저런 얘기를 들었다 하면 "아.. 쟤는 이거 쳐다도 안 보겠구나." 생각하고 맘을 접으면 된다.
인기 표현이라고 대충 익혀서 막 써 먹다가는 나락가기 쉽상이다. 대부분의 오피서들이 착각한다. 말하기를 잘 해야 한다고. 아니다. 외국어가 아무리 스피킹 시대라지만, 스피킹을 위해서는 리스닝이 우선이다.
쉽다고 아무때나 확인한다 검토한다 Ctrl C+Ctrl V 남발하지 말고, 먼저 듣자. 이 게임은 리스닝이 우선인 게임이다.
묵혀둔 검토 얼마나 되는가?
혹시 생각은 나는가?
뭘 확인하겠다고 했는지?
그건 그렇고 뭐 검토한다고 하긴 한 거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 몬가 있었는데..
P.S. 오피서들아. 검토하겠다고 했던 거 뭐뭐 있었는지 확인해 보자. 더 묵혀뒀다가 왠지 오늘 뭔가 폭탄 하나 터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