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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글 Mar 22. 2024

20화. 호르몬 전쟁(1)

반(半) 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1. 이름 : I

  - 직업 : 가사노동자

  - 자녀(연령) : 여아 1(19세), 남아 1(15세)

  - 기타 : 지혜의 이웃주민


 "니가 돼지랑 다를 게 뭐야? 어? 좋은 말이 나오게 니가 행동을 해야지! 니 꼬라지를 보고서 말이 곱게 나오겠어?"

 남편이 아들 주형을 봐주는 틈을 타 묵혔던 재활용더미를 양손에 들고 집을 나서던 지혜였다. 옆집에서 들려오는 너무나 큰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문이 열려있나 쳐다보았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대문을 뚫고 날선 문장을 뱉어내는 목소리는 분명 옆집 아주머니의 것이었다.

 복도에서 주형과 지혜를 마주할 때마다 주형의 이름을 외워주고 다정하게 불러 인사해 주시던 분이었다. 가끔 쿠키를 구웠다며 지혜의 집에 나눔을 해 주기도 하고, 주형이 너무 이쁘게 잘 크고 있는 것 같다며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기도 하셨다. 언제나 말갛고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다녀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야지, 생각했던 지혜였기에 갑자기 복도에 울려 퍼진 그녀의 고함소리가 너무나도 생경했다.


 벌컥

 굳게 닫혀있던 문이 갑작스레 열리며 건장한 청년 하나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지혜를 흘긋 보았지만 인사는 하지 않고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패딩잠바에 핸드폰과 손을 모두 꽂아넣는 그였다. 상대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안바뀌면 큰일 날 태세로 빠르게 변하는 숫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들이구나, 벌써 걔가 저렇게 컸구나. 지혜는 그가 그 집의 막내아들임을 알아채고 요즘 청소년의 빠른 성장과 발육에 새삼 놀랐다. 안녕하세요, 꼬박꼬박 인사하던 참한 아이였는데. 어느덧 수염이 거뭇거뭇한 어둠의 사내로 자라 나 있었다.


 재활용을 버리고 집으로 들어가자니 아까 그 청년의 반토막 밖에 되지 않는 주형이 오종종 달려와 지혜의 다리에 폭 안겼다. 그 손길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평소답지 않게 번쩍 들어올려 안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주형의 볼에 입술을 비비며 뽀뽀를 하는데 아기향이 폴폴 나고 살결은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몇 분 전 보았던 수염 거뭇한 청년의 시절을 주형도 맞이하겠지, 싶어 지금의 시간이 마냥 아쉬운 지혜였다.



 아들 인우가 나간 현관문을 부수고만 싶은 I였다. 안 그래도 시시때때로 열이 오르는 몸이었는데 아들과의 한바탕 전쟁으로 온몸은 불바다가 되었다. 모든 걸 다 때려 부수고만 싶었다.

 식탁에서는 딸과 남편이 I의 눈치를 보며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고요한 집에는 달그락달그락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I의 남편은 지금 I에게 어쭙잖은 조언이나 지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지난날의 교훈으로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그저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내가 지땜에 한 게 얼만데, 어? 저게 무슨 꼬라지야? 대답도 안 하고 그냥 튀어나가? 그렇게 먹고 자고 놀기만 할 거면 돼지새끼랑 다른 게 뭐냐고! 아우 더워. 집이 왜 이렇게 더워."

20년 전 연애를 하던 때부터 결혼생활까지 아내 I는 입에 욕설 한 번 담은 적 없는 온순하고 고상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가 1년 전부터 욕 비슷한 것을 입에 담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는 내가 왜 그랬지 자책을 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화를 냈다가 자책하고, 우울했다가 다시 화를 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아내의 증상을 입력해 검색한 뒤 그것이 갱년기의 전형적인 증상이란 것을 알게 됐다. 큰일이다 싶었다.

 

 하지만 더 큰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범생이며 살갑던 막내아들이 하루가 다르게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기하게 말수는 적어지는데 말대꾸는 늘어갔다. 아니, 말을 하는 족족 말대꾸였다. 내 아들이지만 마음 같아선 정말 때리고만 싶은 날들이었다. 너 옛날 같으면 죽도록 맞았어,라는 그에게 아들은 가정폭력으로 신고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때리고 싶었다.

 아들은 I부부가 제안하는 모든 것들은 다 거부했다. 가까운 외출부터 여행, 외식, 공부, 진로, 가벼운 대화까지. 제안을 하기도 전에 아니, 싫어라는 대답을 미리 탑재해 놓은 듯 뱉어댔다. 공부를 잘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진작에 그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집에 제때 들어오는 것만으로 고맙다고 여겨야했다. 첫째 딸을 키우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라 이게 뭔가 했다. 다시 한번 인터넷 검색창의 힘을 빌려 그것이 사춘기의 표준 패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끝이구나 싶었다.


I의 남편은 창문을 열어 차가운 바람을 집으로 들였다. 갱년기 아내의 열이 가라앉길, 사춘기 아들의 마음이 돌아오길 간절히 소망했다. 내가 알던 그들로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남편의 환기에도 도통 속에서 올라온 열이 가라앉지 않는 I였다. 말없이 옷장 속의 얇은 점퍼를 꺼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이놈의 집구석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을 듯했다.

 발 닿는대로 탄천을 걷자니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화가 나서인지, 슬퍼서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 길 없이 그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옷소매로 대충 닦으며 걸으니 마주하여 걸어오고 있는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 그와 똑같이 눈물을 훔치며 걷고 있었다. 저이도 나와 같은 연유일까, 눈물의 탄천이었다.


 정말 예뻤던 아들이었다. 엄마한테서 떨어질 줄 몰라 '엄마 껌딱지'라는 별명을 어른들이 장난 삼아 붙여주어도 아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되려 신이 나 제 입으로 나는 엄마 껌딱지예요,라고 말하고 다니던 아이였다.

 엄마랑 결혼한다는 그에게 엄마랑은 결혼 못해,라고 이르니 그럼 자기는 결혼 안 하고 평생 엄마랑 살겠다고 했었는데. 물론 그 말을 순전히 다 믿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으로 대하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른인 내가 아이를 좀 더 보듬고 품어줬어야 했을까.

 I의 다리는 일관적이고 규칙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점점 꼬이며 복잡해지기만 했다. 부쩍 심해지는 관절통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I는 손을 주물거리며 속도를 높여 걸었다.



 3년 전부터 생리주기가 뜨문뜨문해졌었다. 이상하다 싶어 산부인과를 향했더니 갱년기가 오고 있으니 준비하라 일렀다. 갱년기라니, 내가 벌써, 싶은 마음에 한없이 마음이 울적해졌다.

 사람마다 갱년기를 겪는 증상과 기간이 상이하다고 했기에 나는 조금 수월하게 지나가길 빌던 I였다. 운동도 꼬박 하고 음식도 가려먹는 편이라 잘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내 마음같지 않았다.


 시작은 눈에서부터 찾아왔다. 책을 좋아했던 I가 여느 때와 같이 책을 펼쳤던 어느 날, 눈앞의 글자가 도통 잘 읽히질 않았다. 그리 작은 글씨도 아니었는데, 뿌옇게 어물거리는 글자에 I는 흠칫 놀랐다. 드디어 왔구나, 싶었다. 보이는 것이 잘 되지 않으니 책 읽기가 소원해졌고, 좋아하던 책을 읽지 못하니 우울감이 덮쳐왔다. 운동 뒤 도서관에서 들러 시작하던 하루일과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우울해져 가던 어느 날, 장을 보고 현관문 앞에 서니 이번엔 갑자기 머릿속이 안개 낀 듯 흐려졌다. 현관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근 10년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비밀번호였다. 네 번을 틀리고 나서야 기억이 나 힘겹게 집에 입성할 수 있었다. 큰 충격에 장을 본 비닐봉지를 바닥에 팽개쳐 놓고 한참 동안 치매초기증세를 검색해 봤었다.

 

 갖가지 걱정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저녁 9시만 되어도 졸려 잠자리에 들었지만 여지없이 새벽 3,4시에 깨어났다. 그 시간에 잠을 깨면 그렇게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 걱정, 남편걱정, 부모님 걱정, 애들 걱정, 걱정, 걱정, 걱정. 그러다 아침이 밝아오고 식사를 차릴 시간이 찾아왔다. 관절들은 욱신거리고 머리는 무겁고, 몸에서는 열이 수시로 올랐다. 도통 잔 것 같지도 않은 날들에 피로는 날로 쌓였고, 우울감은 그에 비례하여 높아져만 갔다.


 병원이라도 가봐야 되지 않아,라는 남편의 말에 처음엔 별거 아닐 거라며 병원을 거부했다. 갱년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면 정말 늙었다는 사실을 인증받는 꼴이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에서 보내오는 구조신호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고,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갱년기가 찾아왔다는 진단을 받았다. 약을 처방받았으나 하혈을 하는 부작용 증세를 겪어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온전히, 오롯이, I가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어찌 이리 시간이 빠르게 흐른 걸까. 나에게도 꽃과 같던 시간이 분명 존재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들은 후회와 미련의 시간들로 점철되었다.

 쑤셔가는 몸에 전혀 기운이 없어도 삼시 세끼 밥을 먹을 시간이 되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상을 차려내는 자신의 모습에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라는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 자신이 아닌 가족들을 돌보아왔던 십 수년의 시간들 후에 찾아온 것이 고작 이런 시간들인 줄 알았더라면 전혀 다른 선택을 했을 터였다. 나의 살과 뼈를 깎아 먹여낸 이들은 각자 회사의 부장이 되고, 어여쁜 대학생이 되고, 의젓한 청소년이 되어있었다. 나만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세상천지 바보였고, 미련퉁이였다.


 그때부터였다. I의 눈에서는 눈물이 시시때때로 흘러내렸다. 눈물이 한 번 흐르면, 그 무엇도 그것을 한동안 멈출 수 없었다. 지금 그이의 눈에 여지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급하게 나오느라 물을 못 챙겼구나, 눈물과 땀으로 배출된 수분탓에 갈증이 몰려오는 I였다. 잠깐 샛길로 빠져나와 편의점 들러 생수 한병만 사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 앞에는 까만 패딩 무리가 컵라면을 먹어대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집 돼지새끼, 인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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