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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글 Mar 24. 2024

21화. 호르몬 전쟁(2)

반(半) 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1. 이름 : I

  - 직업 : 가사노동자

  - 자녀(연령) : 여아 1(19세), 남아 1(15세)

  - 기타 : 지혜의 이웃주민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엄마였습니다. 어느 누가 엄마에게 알은체를 할까요. 저는 엄마를 모른 체 하기로 했습니다.

 엄마 역시 저의 어정쩡한 시선처리에 저를 못 본 척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일분 채 되지 않아 물 한병을 사들고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발견한 눈빛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애써 모른척 하는 그 모습마저 너무 싫었습니다. 엄마의 얼굴만 봐도 짜증이 솟구쳐 올라 라면 맛이 뚝 떨어져 남은 라면은 버려버렸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엄마가 좋다고 매달리더니."

 "너 어릴땐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는데."

 "도대체 그 때 걔는 어딨니? 내 앞에 있는 건 누구니?"

 차라리 엄마 친구 아들과 비교를 하는게 나았습니다. 엄마는 계속해서 예전의 저와 지금의 저를 비교하셨습니다. 그것은 가히 고통이었습니다.

 이미 전 예전의 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의 제가 어쨌고 저쨌고 걔가 누군지 저는 이제 모릅니다.


 엄마의 껌딱지였니 뭐니 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고, 갑작스런 터치는 거북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어릴때야 엄마의 보호를 받아야되니 엄마한테 붙어있었겠지요. 그 시절이 기억나지 않고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때는 그것이 좋았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전 이제 컸습니다. 더이상 엄마의 얼굴에 내 볼을 갖다 부비며 뽀뽀를 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났습니다. 다른 어떤 이의 손길이 조금만 닿아도 자극적입니다.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커졌고, 변했습니다. 엄마와 누나는 히죽거리며 이젠 제가 징그럽다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지만 거울 속의 저는 진실로 징그럽습니다. 갑작스레 변해버린, 변하는 중인 제 몸에 아직도 천천히 적응 중입니다. 제발, 아무렇게나 제 몸을 건드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너한테 한 게 얼만데."

 "내가 너 키우느라고 포기한게 뭔 줄 아니."

 "이러려고 널 이렇게까지 키운 줄 알어?"

 누가 그렇게까지 희생하고 키워달라고 했습니까? 제가 바란건가요? 제가 해달라고 했나요? 그러실거면 아예 낳아주질 않으셨으면 좋았겠지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게 해주셨어야 합니다.

 한글 책도 못 읽는 저를 다짜고짜 영어유치원으로 보내셨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정말이지 하루도 유치원을 가고싶었던 적이 없습니다. 죽도록 가기 싫었습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떠들어대는 선생과 잘난체 하는 애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놀이고 공부고 뭐든 할 수 없었습니다. 용기내서 엄마에게 엄마, 저 다시 원래 유치원으로 갈래요, 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원래 그런거라며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질거라고 하셨었죠. 하지만 전혀 괜찮아지지 않은 상태로 졸업까지 마쳤습니다. 엄마는 뿌듯해하셨고, 저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놈의 영어, 영어, 영어. 엄마는 얼마나 영어를 잘하길래 그 죽일놈의 영어로 저를 괴롭힌걸까요. 다 너를 위해서 하는거야,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줄 알아? 따위의 말은 저에게 무서운 압박으로만 작용했습니다. 고마움을 느끼라고 한 말일까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딴 말을 뱉어내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니 다시 입으로는 욕이 쏟아져 나옵니다.

 

 영어 뿐일까요. 기합소리 시끄러워 싫다는 태권도 학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수업에 한번도 집중 한 적 없는 수학학원도, 엄마는 제 등을 떠밀며 보내셨죠. 가끔 열심히 노력해 잘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돈이 좋네 라는 말로 제가 아닌 돈을 칭찬했었습니다. 그래보이긴 했습니다. 엄마는 저보다 돈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미술학원도 억지로 끌려갔었죠. 엄마는 알까요. 제가 엉망으로 그려놓은 그림이 선생님의 마지막 1분 정도의 터치동안 전혀 다른 그림이 되었다는 걸. 엄마는 제가 피카소가 된 마냥 그림이 너무 많이 늘었다며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건 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이었겠죠.

 정작 계속 다니고싶다던 피아노학원은 4학년이 되자 끊어버리셨죠. 엄마는 이제 공부를 해야된다며 일순간 모든 예체능 활동을 중단시켰습니다. 피아노만 다니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그 정도면 다 배우지 않았냐며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셨죠. 참,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십니다.


 지쳤습니다. 어릴때부터 엄마가 준비한 런닝머신에 올라타 엄마가 맞춰놓은 속도대로 달리자니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공부고 뭐고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학원 다니느라 바쁠 때 놀이터에서 놀던 애들이 이젠 저보다 공부를 잘하는 모습을 볼때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습니다. 어린시절의 제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 모든 건, 엄마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제 탓, 무엇을 해도 못난 아이. 그런 취급을 하는데 집에서 말을 하고 싶을까요?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저를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엄마는 갱년기인지 무엇인지를 겪는다며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칠 때가 있다고 했지만, 제가 보기엔 예전부터 엄마는 저한테 화를내고 짜증을 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화풀이 대상으로 대하셨죠.

 저보고 말뽄새가 뭐라느니 말 조심하라느니 별 말씀을 다하시면서 정작 본인은 험한 말을 저에게 내뱉으시죠. 새끼니 뭐니, 그런 말을 저는 적어도 엄마에게 내뱉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저에게 아무렇지 않게 발산했습니다. 누가 더 나쁜사람일까요?

 

 아빠와 누나도 짜증이 납니다. 방관자가 따로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놀던 아이들이 부러워 저도 아빠에게 종종 매달렸었죠. 아빠는 주말에 놀아달라는 저의 말을 언제나 짓밟으시곤 소파에 누워 일어나질 않으셨습니다. 엄마 때문에 힘들어 아빠에게 어렵사리 진심을 털어놓았던 날에도 아빠는 엄마가 널 위해서 하는거야, 라는 말로 제 말을 온전히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갑자기 제 방 문을 벌컥 열고 학교가 어떠니, 고민이 뭐니, 둥의 말을 꺼내며 갑자기 심리상담사 빙의 하는 그 태도는 무엇입니까. 정말 역겹습니다. 필요할 때는 곁에 없더니, 이제와서 무엇을 메꾸려고 하시는 걸까요. 거부하겠습니다.

 나는 사춘기같은거 없었는데, 라는 말로 이죽대는 누나는 정말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습니다. 말이 험하게 나왔을까요? 하지만 진심입니다. 때로는 갑갑한 엄마를, 때로는 무심한 아빠를 닮은 그 얼굴로 저를 비난하듯 비웃는 그 얼굴을 마음 같아선 짓이기고만 싶습니다. 계속해서 엇나가는 저에게 보란듯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모범생이 되려하는 그 추악한 속내를 제가 모를까요. 엄마고 아빠고 그따위 사랑 혼자 다 가져도 저는 상관 없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가끔 말 없이 울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 저도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겁이 많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엄마는 교문앞으로 저를 바래다주고 배웅하러 오셨습니다. 엄마의 손을 잡으면 학교 가는길이 전혀 겁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햇살 따뜻한 길은 그 어떤 때보다 행복했습니다.

 티브이를 보다 저거 먹고싶다, 라는 한마디만 내뱉어도 다음날 저녁 반찬으로 올라왔습니다.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져 바깥 음식은 저에게 맛이 없는 음식입니다. 엄마 밥이 제일 맛있어, 라고 떠들어댔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습니다.

 이 나이에도 무서운 꿈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럴때면 종종 엄마의 품에서 잠들던 때를 생각합니다. 악몽에서 깨어 무서운 기분이 들 때에 자연스레 엄마가 잠든 곳으로 가 이불을 들추고 엄마곁으로 부스럭대면서 누우면, 엄마는 늘 잠결에도 저를 폭 안아주셨습니다. 엄마가 괜찮아, 등을 토닥여주면 1분도 안되어 다시 잠들던 그 때가, 가끔은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섭습니다.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이런 식으로 살아가다 구제불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바보 멍청이가 될지도요. 그런 생각들에 요즘은 하루에 한번씩 꼭 악몽을 꿉니다. 무언가가 저를 계속 쫓아와 저는 죽을 힘 다해 도망치지만 결국 전 매번 지고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보았지만 성적이 잘 나오질 않았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인간은 우리나라에서 바보 멍청이로 살아가야됩니다. 저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다 잘 해나가는 것 같은데 저만 이런 것 같습니다. 다 같이 놀고 다 같이 학원을 가는데 왜 저만 이모양 이 꼴일까요. 누나는 잘만 했는데, 왜 저는 이렇게 못난걸까요. 너무 무섭고 갑갑합니다.

 넌 뭐가 되고 싶니, 라는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게 뭔지, 하고싶은 게 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되고싶은게 정말 궁금한걸까요. 어른들이 정해놓은 뭐가 되면 좋은, 그것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만 전 바보 멍청이라서 그것이 될 순 없을겁니다. 그래서 전, 망했습니다.


 왜 태어난걸까요. 살아가는게 너무 힘이 듭니다. 제가 사춘기라 그렇다고, 사춘기는 다 그런거라고 하더군요. 다 지나가는 일이라고요.

 정말 그럴까요. 전 이제 고작 15살인데 이제 그만 살고 싶습니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누가 토닥여준다면.

 사실, 따뜻한 엄마의 품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파트 정문 앞에 서 있는 엄마를 발견합니다. 수 년 전, 교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모습보다 많이 늙어있는 엄마입니다. 저의 키가 자란만큼 엄마의 얼굴엔 주름이 늘었습니다.

 엄마와 눈이 마주칩니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칩니다. 저에게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 저러고 있는걸까요. 팔짱을 낀 저 무서운 자세에 벌써부터 구토가 나려합니다. 발길을 돌려 다시 학원 건물쪽으로 노선을 바꿉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냥 집으로 가고싶지 않아졌습니다.


 아직은, 엄마를 보고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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