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아 Jun 21. 2024

나에게 동화의 시작은 흑백이었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였다. 프뢰*이라는 곳에서 책을 팔러 오셨다. 여러 책들을 샘플로 가져와서, 이런저런 책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아기들이 왜 그림책을 봐야 하는지 우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근데, 나는 이미 그 자랑에 홀랑 넘어갔다. 동화책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내 마음을 홀랑 가져간 것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난 이것저것 책들을 주문했다. 부모님들에게 받은 출산축하 용돈을 몽땅 다 써버렸다.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딸아이가 나와 눈 맞춤을 하기 시작할 때쯤, 산후조리원에서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커다란 박스가 배달이 와서 순간, '내가 뭘 한 거지.'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나는 박스를 오픈하고 책을 꺼내고 있었다. 책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나는 내가 점점 흥분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보며 설레었고, 글들을 보며 힐링되었고, 그림과 글들을 함께 보며 이야기 속에서 웃고 있었다. 책이란 이런 거구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책이라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와 그림책들이 연결되었다. 


한참을 자고 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위한 첫 책'이라는 주제 속의 책 한 권을 들고 딸아이에게 달려갔다. 아이를 한번 대충 안아주고는, 울음을 그치게 한 후, 바로 다시 침대에 눕혀놨다. 그리고 나도 딸아이옆에 누워 책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주었다. 내 심장소리와 아이의 심장소리만 들릴만큼 우리는 조용했다. 아이와 나와 그림책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내가 처음 딸아이에게 보여준 그림책은 이런 그림이었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책. 아직 색을 구별 못하는 아기들을 위한 책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극성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그 책이 나와 딸아이의 놀잇감이었다. 맨날 똑같은 이런 흑백의 그림책을 보여주며, 나는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 혼자 쫑알쫑알 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딸아이가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했는지,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을 책에 집중하고 있는 아기를 볼 때마다,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책을 들이밀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도 바로 책에 눈의 초점을 맞추는 아이를 보며 내가 더 놀랬기 때문이다.


그렇게 흑백에서 시작된 그림책에 대한 사랑은 글이 있는 동화책으로 이어졌고, 지금 18년이 지금까지도 나는 동화책을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은 바쁘셨고, 분명 나를 위해 매일 책을 읽어주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첫 동화책은 내가 딸아이를 위해 구입한 책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흑백의 그림책들은 나에게 동화책에 대한 기본뿐만 아니라 나의 삶의 기본부터 알려주는 책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흑과 백. 


동양화를 배우며 익힌 여백의 미, 이에 대해서는 다른 브런치북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백을 만드는 디자이너


디자인을 배우면서는 검은색 부분이 negative space의 개념을 가지면서, 가끔은 이 negative space를 활용하여 로고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배움을 통해 나는 흑과 백의 관계를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운듯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서모임에 가입하고 첫째 날, 그날의 토론 주제는 양극이었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이면을 살피는 법, 양쪽 끝에 대립되는 양극... 그리고 그 전체를 하나로 보는 다양한 양극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딸아이에게 보여줬던 흑백의 그림책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그 흑백의 책이 단순한 책이 아니었구나.


하얀색과 검은색이 대립되면서도 표현되는 하나의 그림, 그리고 여러 가지의 흑백의 그림들을 모아 더 큰 그림으로 확장되던 그림책. 양극의 이야기를 독서모임에서 들을 때마다 나는 다양한 흑백의 그림들이 자석처럼 내 머릿속으로 알아서 착착 찾아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멋모르고 딸아이에게 매일매일 보여줬던 그 흑백의 책이, 18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줄이야. 그리고, 그것이 나의 독서의 기본이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나의 삶으로 들어와, 이면을 살피는 훈련을 계속하며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 진정한 Re-Parenting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나의 여러 경험에서 얻은 흑백이 가진 여백의 미와, negative space의 개념과, 그리고 양극의 이야기들을 동화 속에, 나의 일러스트에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의 동화를 만드는 여정의 바탕에 흑백의 책이 있을 줄이야.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이전 01화 제일 좋아하는 걸 살피다 보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