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영어 이름이 있다. Grace. 한글 이름 '근아'와 비슷한 자음으로 시작되고, 내가 좋아하는 단어 'graceful'의 의미가 담겨 있다.
호주로 건너와 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영어 이름이 필요해졌고, 그때 나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나만의 캐릭터를 함께 만들었다. 원래의 내 모습보다는 좀 더 활발하고, 목소리도 크고, 무엇보다 실수에 얽매이지 않는 쿨한 성격의 캐릭터. 나는 그 캐릭터를 '영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나를 대신해 등장시켰다. 영어 수업에서만큼은 그레이스가 되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신감을 갖고 실수조차 즐기는 내가 되려 노력했었다. 마치 새로운 성격을 입고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어학원을 다니며 친구들과 좀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소통한 듯하다.
하지만 디자인 대학원이 시작되면서, 나는 다시 본래의 이름인 근아로 돌아왔다. 솔직히, 내 이름이 외국인들에게 발음하기 어렵고 기억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의 이름을 그럴싸하게 발음했고, 나는 그 발음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근아'와 호주에서의 '근아'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이름은 같지만, 내가 그려내는 모습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며 나만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주 전 영어 숙제로 매일 녹음을 해야 할 때, 오래간만에 그레이스의 캐릭터를 다시 꺼내 활용해 봤다. 수업에 임하기 전에 마음가짐을 그레이스답게 정비하고 녹음을 시작하자, 며칠이 지나니 어느 순간 영어를 할 때만 나오는 특별한 목소리가 만들어졌다.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서는 나는 내가 그레이스인지, 근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얼마 전 글에 쓴 대로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용기도 그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레이스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자유와 여유를 주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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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정원은 봄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꽃들이 순차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흡사 그들만의 순서와 시기가 정해져 있는 듯, 정확히 한 무리의 꽃이 활짝 피고 질 때쯤, 다음 꽃들이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인생의 각 나이대마다 나의 다른 모습이 피어났고, 짧은 하루하루를 돌아보면 그날의 역할과 상황에 맞춰 여러 가지 모습을 띠며 살아가고 있다. 그레이스와 근아, 그 두 캐릭터도 그저 꽃의 한 부분일 뿐,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며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내가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역할을 소화해내고 있다. 매일이 한 송이 꽃이라면, 내가 피어내는 꽃들은 그날의 환경에 따라 모양과 색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은 그레이스로, 내일은 근아로, 혹은 또 다른 모습으로. 그 모든 모습이 다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더 이상 어떤 역할을 하나로 고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며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름이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이 그 순간의 나를 대변해 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나의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그 정체성은 마치 계절에 따라 피어나는 꽃들처럼 순환하며 변화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단 한 사람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닌, 상황과 환경에 맞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삶이란, 결국 그렇게 끊임없이 변주되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과정 아닐까 싶다. 그러니 나는 다양한 나의 모습을 탐구하고 활용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