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딸의 수능이 끝나면 날 찾지 마."
더 정확히 말하면, 나 홀로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선언이었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당시의 나는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내 일상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나의 하루를 가득 채웠다. 8살 터울의 남매를 키우며 첫째의 육아가 끝나갈 무렵, 둘째가 태어났고, 그렇게 반복되는 육아의 순환 속에서 나는 종종 내 존재 자체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마음이었지만, 그러기엔 하루의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나 부족했다.
하지만, 삶은 이상하리만큼 나를 그 삶에도 적응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족했던 나만의 시간을 찾으려는 절박함은 새벽 4시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창밖은 고요했지만,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시끄러운 여러 생각들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벽 시간은 처음에는 영어 공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말과 문장을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한계를 넘는 경험이었다.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를 찾고 싶다는 그 갈망은 또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내 안에 쌓아두었던 감정과 생각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줄, 두 줄 적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글은 점점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다시 만나며, 나의 내면을 탐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나는 일상 속에서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 지나쳐 버렸던 순간들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글들은 시간이 흘러 동시집으로 출간되었고, 그것은 나를 증명하는 일이었고, 새벽의 고요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나의 목소리가 세상에 닿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새벽은 또 다른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호주에서의 디자인대학원 공부로 이어졌고, 이런 경험에서 들어오는 지식은 내 존재를 더 확실하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나는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씩 더 분명히 깨달아갔다. 특히 최근 1년은 그 시간의 정점을 이루었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 길은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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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시간들이 보상을 준 걸까. 딸아이가 호주의 수능을 마치고 새로운 독립의 여정을 시작하자, 나 또한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나만의 독립을 허락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나의 역할은 점점 뒤로 물러났고, 그 공백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으로 서서히 채워지고 있다. 마치 그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힘이 점차 느슨해지며, 그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이 들어서는 듯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때로는 자신을 버리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희생 속에서도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씨앗은 늘 자라고 있었다. 내가 부족했던 시간을 새벽 시간으로 채웠듯, 내 삶은 어느 순간 스스로 균형을 찾아갔다.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에게 시간을 허락하고, 그 안에서 천천히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는 앞으로 어떤 시간을 살아가게 될까? 내 삶에서 나를 위한 여백이 드디어 생긴 지금, 그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새벽 시간 속에서 시작된 나만의 성장은 이제 조금 더 넓은 시간과 자유 속에서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성장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것은 멀리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여정에 가깝다.
이제야 조금씩 느낀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들이 하나의 기반이었다면, 이제는 그 위에 내가 원하는 모습을 그릴 차례다. 새벽에 시작했던 글쓰기와 학업처럼,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를 새로 써 내려가는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