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paper issue 02. Ep 02
몇 달 전부터 영어책을 읽을 때 한국어 번역본도 함께 보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 시작은 어제 언급했던, Midnight Library를 구입하면서였다.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거나,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마다 흐름이 끊기는 게 신경 쓰였다. 이럴경우, 처음에는 다른 영어원서를 읽을 때처럼, 몰라도 넘어가거나,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어라면 사전을 찾아보는 방법을 썼지만, 이책을 읽을 때는 더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더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싶었고, 좀더 많은 부분에 흥미를 잃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읽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한국번역본을 Ebook으로 구입해서 함께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다시 종이책으로 구입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다른 영어원서 2권도 번역본을 함께 구입해왔다.
호주로 돌아와서는, 하루에 몇 장씩 읽겠다는 목표 없이, 그때그때 읽고 싶은 방식대로 책을 펼쳐 읽고 있다. 영어책을 먼저 넘겨볼 때도 있고, 한국어 번역본을 먼저 읽을 때도 있다. 또한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번갈아 보기도 한다. 처음에는 계획을 세워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 영어든 한국어든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읽고 있었기에 그 계획들은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몇가지가 있다.
첫째, 영어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호기심과 답답함을 바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단어를 만날 때,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게 다가올 때, 번역본을 함께 보면 그 순간의 궁금증이 즉시 해소된다. 하나의 단어 뜻만이 아닌, 문맥속에서의 뉘앙스까지 느껴지니 사전을 찾아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도가 높아졌다. 한국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문장 속에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표현을 영어로 말하려면 어떻게 표현해야하지? 이때 영어원서본이 있다면, 의미의 결을 어떻게 살렸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언어를 바라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같은 의미의 문장이라도 언어에 따라 전하는 느낌이 달라지고, 어떤 표현은 한 언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다른 언어로 옮기면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 언어라는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째, 자연스럽게 영어 원서와 한국어 번역본을 비교하게 되면서, 작가가 의도했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어 번역에서는 단순히 "멀어져 갔다." 라고 표현된 문장이, 원서에서는 "retreated"라는 단어로 쓰였다. 겉으로 보기엔 같은 의미 같지만, 뉘앙스는 분명히 다르다. "retreated"는 후퇴하며 다시 멀어지는, 의도적인 움직임이 포함된 단어다. 원서와 번역본을 함께 읽지 않았다면, 이런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원문을 다시 읽다 보면, 작가가 단어 하나를 고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 선택이 문장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결국, 글이란 단어를 엮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고, 독자가 받아들이는 감정이 달라진다. 이는 번역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셋째, 내가 이렇게 영어원서와 번역본을 함께 읽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어공부를 재미나게 꾸준하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연습이 아닌,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해 나가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영어를 공부할 때, 그저 단어를 외우고 독해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어떤 언어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고의 흐름이 달라지고,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래서인지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보며 읽다 보면, 두 언어의 비교뿐만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리고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방식이 번역가들이 평소 번역 공부를 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호주로 올때,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막연히 번역이라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서 그냥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시작한 이 방식이, 나도 모르게 번역가들이 언어를 다루는 방식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글의 결을 살리고, 뉘앙스를 조정하는 과정. 그저 영어학습법 중 하나라고 여겼던 이 방법이, 어쩌면 내가 몰랐던 또 다른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책들이 있다. 언젠가 번역해보고 싶은 책들. 영어에서 한국어로, 한국어에서 영어로.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하는 과정같다. 또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하나의 문화와 정서를 새로운 틀에 담아내는 일이며, 의미를 재구성하는 창작 행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런 작업을 해볼 수 있을까. 막연했던 생각이 이제는 조금씩 구체적인 바람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