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는 순간, 글자 속 인물들이 내 앞에 홀로그램처럼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처음에는 몇 개의 단어와 문장 속에 갇혀 있던 존재들이 점점 표정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친숙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들과 함께 숨 쉬고, 기뻐하고, 때로는 마음 아파한다. 문득 나는 이런 몰입의 순간을 북디자이너로서는 디자인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그림으로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하며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최근에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이 특히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내 앞에 또렷한 이미지로 나타났다. 글 속에는 어떠한 묘사도 없었지만, 첫 문장의 느낌만으로도 그녀는 나에게 강렬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인물은 책을 읽는 내내 한결같았다. 고요하지만 강인했고,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찾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머무는 공간과 주변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상상했다. 어두운 색조의 조용한 방, 테이블 위의 체스판, 무심히 던져진 책 한 권,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한 장의 그림처럼 떠오르며, 이 책의 표지를 디자인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그 인물의 본질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색을 찾고, 적절한 활자와 여백을 고려한다.
그녀의 내면처럼 깊이 있는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묵직한 톤의 색상을 선택해야 할까,
절제된 디자인으로 그녀의 조용한 강인함을 보여줘야 할까?
어떤 표지가 이 인물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실제로 이 책을 위한 일러스트나 표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내 머릿속은 이미 소설 속 인물의 내면과 '나'를 연결 짓고 있다. 이는 올해 내가 맡게 될, 캐릭터의 감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책의 일러스트 작업을 위한 소중한 연습이 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캐릭터에 빠져드는 경험은 또 다른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 인물의 삶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북디자이너로서 나는 독자가 책을 펼치기 전, 표지에 담긴 캐릭터의 세계를 통해 작은 흥미를 느끼길 바란다. 한 인물의 이야기와 감정을 담은 오브제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표지는 이야기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이며, 독자가 처음 마주하는 문턱이다. 표지 디자인은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감성을 잇는 다리와 같다. 그 안에 담긴 서사의 결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책 속 캐릭터를 디자인으로 담아내는 과정은 한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일과 같다. 사람의 성격, 감정, 내면의 깊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일은 마치 철학적 탐구와도 같다. 과연 한 인물의 본질을 온전히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표지는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겨 독자가 스스로 채워갈 공간을 마련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디자인을 넘어 나의 예술과 창작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런 고민은 내가 단순히 이미지의 형태만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감정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독자가 표지를 보고 손을 뻗어 책을 펼치는 순간, 그 디자인이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