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선을 긋다’ 혹은 ‘선을 넘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선을 그었다는 것은 상대와의 거리 두기, 단절, 혹은 냉정한 구분을 의미하고, 선을 넘었다는 것은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도를 넘는 행동으로 인식된다. 그만큼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선이라는 경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그 경계를 유지하거나 넘지 않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이 선을 인간관계가 아닌,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았다.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
그랬을 때,
이 선은 나를 제한하거나 막는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먼저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 선을 그었다. 해야 할 일은 현실적 필요와 책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은 내 호기심과 열정이 향하는 곳이었다.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한 후, 하고 싶은 일 중에서도 지금 이 시기에 나에게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선으로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욕심과 산만한 관심사에는 과감히 취소선을 그어 보았다. 마치 일기장에 메모하듯이, 지금은 보류하거나 내려놓을 것들을 하나씩 지워갔다. 그러자 내 하루는 훨씬 더 가벼워졌고,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는 세로로 선을 그었다.
그 선은 나의 한계를 체크하는 선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과 아직은 어려운 것을 구분하며, 스스로의 현재 위치를 솔직하게 바라보았다. 이 선을 통해 나는 무조건적인 가능성이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의 기반 위에 서려고 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그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다음으로 나는 가로로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기간을 정하는 선이었다. 언제까지 이 목표를 이루어볼 것인지,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끝이 없는 욕심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 설정을 해 보았다. 이렇게 기간을 설정하는 것은 나에게 마감이라는 긴장감을 주었고, 동시에 지키고 싶은 약속이라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세로 선과 가로선이 만나는 그곳,
더 이상 위도도 경도도 의미 없는 그 지점이 있다.
바로 ‘제로 포인트(Zero Point)’,
나의 평온이 머무는 자리다.
이 지점에서는 나를 억누르던 긴장도,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집착도,
세상을 향한 증명 욕구도 모두 사라진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던 마음도 잠시 멈춘다.
바닥도, 꼭대기도 아닌, 오직 ‘지금 여기’만이 존재하는 상태.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나를 밀어붙이지 않고, 억지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마치
자연이 그러하듯이,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그 평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갈등과 질문, 끝없는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더 이상 싸울 이유도, 도망칠 이유도 없을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고요다. 그 상태는 외부에서 보면 멈춘 듯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가장 깊이 움직이고 있는 순간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나 변화는 없지만,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가장 명확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서 있다. 나의 중심에서 나의 중심을 찾았다.
그리고 그 평온으로부터,
나의 제로 포인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만, 이번에는 각각 따로가 아니라,
세로선과,
가로선과,
제로 포인트가
하나로 이어지고,
일체가 되어,
함께 움직인다.
서로를 제한하거나 구속하지 않고,
각각의 방향이 조화를 이루며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나의 평온은 멈춤이 아닌 출발이 된다.
나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나는 매일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매일 다시 시작한다.
마치 하루의 끝에서 다음 하루가 새롭게 열리듯,
나는 나를 reset하며,
내 안의 균형을 다시 세운다.
그것은 멈추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상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길,
바로 중용(中庸) 이다.
이 중용의 상태에서 나는 매일 다시 나아간다.
조급하지 않게,
안일하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가야 할 만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금 나의 제로 포인트를 찾아간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다시 나의 디자인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