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다."
"처음부터 다시."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특히 브런치북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에 자주 쓰인다. 하나의 브런치북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배움과 경험을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제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쌓은 것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고, 기준이 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제 전체를 알았으니,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봐야겠다’
책에 비유하면 이렇다. 처음 책을 손에 쥐고 대강 훑어본 뒤, 이제 전체를 보았으니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찬찬히 정독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런 마음은 현실에서도 자주 찾아온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예중·예고·회화과를 거쳤지만, 여전히 어딘가 허전하고 구멍이 난 듯한 기분이 든다. 배울 때는 배우느라 바쁘고, 익히느라 정신없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기초를 배운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이론으로 익힌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스펀지 같은 흡수력과 이해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마치 모국어를 익히듯이.
그래서인지, 이제는 어른의 감각으로 이어가려 하면 알 수 없는 한계가 느껴진다. 때로는, 어렸을 적 10살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잘 그리고 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보자.
호주의 아트 스쿨 기초 소묘반에 등록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등록 전에도 기초반과 중급반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내린 결단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자 곧 후회가 밀려왔다.‘중급반으로 옮길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다는 건 꽤 지루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듣다 보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진짜 기초가 보이기 시작했다. 왜 연필을 써야 하는지, 빛과 그림자의 원리를 어떻게 그림에 적용하는지…
분명 10살의 나는 이런 것들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 속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그 의미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쳐버렸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자각’이며, 모든 학습의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다시’ 배우는 과정 속에서, 기초는 단지 시작점이 아니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뿌리이며, 새로움을 발견하는 장소라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났다. 익숙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알고 보니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세계였고, 그 속에서 나는 전체의 구조와 그 안에 숨은 기본을 새롭게 만나고 있었다.
처음과 끝, 전체와 부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를 안다고 느낄 때조차, 그 이해는 부분들의 반복과 순환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부터 시작하는 일은 진정한 전체의 이해를 향한 순환적 여정인 셈이다.
그렇게 처음과 끝, 그리고 끝과 처음이 맞닿는 지점.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다시’라는 단어를 꺼내 든다.
그리고 그 단어 속에서, 또 하나의 시작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