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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디자이너의 언어 - 여백

by 근아

회화과를 졸업했다. 전공은 동양화였다.
동양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 ‘여백의 미’일 것이다.
그림 속에서 일부러 남겨놓는 공간, 그 비어 있음이 오히려 전체를 완성한다.
여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리가 아니라, 시선이 머물고 숨이 쉬는 자리가 된다.

동양화의 여백은 자연에서 발견한 쉼표 같다.
작가가 의도하되,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고, 시간과 감정에 따라 변하는 여지가 있다.
여유롭고, 열려 있고, 감각적인 공간이다.




이후, 호주 디자인 대학원,

북디자인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여백을 만났다.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정하는 것이 내지 페이지의 여백이다.
디자인 용어로는 margin이라 부른다.


북디자인의 여백은 악보 속 쉼표 같다.

음악에서 쉼표가 잠시 멈춤을 주어 다음 소리를 더 선명하게 만들 듯, 페이지의 여백은 글과 이미지가 숨 쉬고 돋보이도록 한다. 또한, 작품 전체의 리듬과 균형을 잡아주며, 정확하고 재현 가능한 구조다. 실수를 줄이고, 의도한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한다.




동양화에서의 여백이 ‘남겨둠’이라면,

북디자인에서의 여백은 ‘미리 정함’이다.


그러나 두 여백 모두 같은 일을 한다.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전체를 지탱하고 완성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관람자의, 혹은 독자의 사유가 채워진다.






<엄마의 유산> 필사노트



요즘 작업하고 있는 필사노트에는 여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책을 읽는 것 자체보다, 필사를 하며 그 여백 속에서 자라나는 사유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공간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여백 또한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백은 조화와 균형을 위한 의도된 장치이며,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디자인이라는 구조 안에서, 여백은 형태와 내용 사이에 숨을 불어넣고, 서로가 충돌하지 않고 어우러지도록 조율한다. 그 속에서 디자이너와 독자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맺는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틀과 공간은 독자의 사유를 초대하고, 독자는 그 초대에 응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채워 넣는다.


이 보이지 않는 조화는 시각적 균형뿐만 아니라, 존재와 의미의 균형을 뜻한다.

여백은 그 자체로 무(無)가 아니라, 잠재적인 가능성의 장(場)을 뜻한다.

그 안에서 무엇이든 태어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여백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일부다.




여백.

가장 먼저 디자인하는 공간이며,

가장 중점에 두고 디자인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독자에게는

가장 보이지 않는 공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이야말로 글과 이미지가 숨 쉬고, 독자의 사유가 자라나는 기반이 되어준다.

여백은 그 모든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숨결이 된다.

여백은 그 모든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숨.길이 된다.










* 지금 쓰고 있는 브런치글에도 그 숨.길이 존재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필사노트는 <위대한 시간2>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시는 분들께 선물로 제공됩니다.

--> 참여 신청 : 건율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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