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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디지털 노마드

by 근아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은 이제 다소 익숙하게 들리지만, 내게는 여전히 오래된 꿈의 이름이다.
첨단 장비를 들고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일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를 뜻하는 말.


코비드 이전부터 나의 꿈 하나는 바로 그것이었다.
여행하며 일하는 사람, 자유롭게 공간을 옮기며 창작하는 전문가.
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그 가능성은 점점 커졌고, 실제로 노트북 하나만 들고 여행지에서 일하던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영국에 오면서는 그 '자유로움'에서 잠시 벗어나야 했다.
책임지고 이뤄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간으로 정오, 매일 12시에 시작되는 북클럽을 리드해야 했다.
그건 영국 시간으로 새벽 4시.
호주에 있을 때도 새벽 4시나 4시 반에 일어났기에,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시간 변경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두뇌가 제대로 깨어나려면 4시 이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결국 나의 기상 시간은 새벽 3시가 되었다.


덩달아, 전날 밤 9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만 다음날 새벽의 북클럽과 하루 종일 이어질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테니.


마침내, 그 새벽의 첫날이 찾아왔다.


시작부터 낭패였다.
밤 9시에 잠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차 탓에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한 채 새벽 1시 반에 눈이 떠졌다.
더 자보려 애썼지만, 이내 포기했다.
새벽 2시 반, 책상 앞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었다.


9월의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누구의 발자국 소리도, 새소리도 없는 런던의 고요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내 안의 불안과 긴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새벽의 공기는 묘했다.
몸은 여전히 무거운데, 마음은 오히려 가볍게 깨어나는 느낌.
그건 어쩌면 ‘책임’의 공기와 ‘자유’의 공기가 섞인 듯한 기분이랄까.
이제는 내가 선택한 일로 인해 깨어 있어야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요구도 아닌, 스스로의 약속 때문에 깨어 있었다.


이것만은 지키자.
이것만은 해내자.
그 단순한 다짐 하나로 깨어 있었다.


홀로, 고요의 시간 속에서 지난 하루의 기록을 노트에 적으며
한국의 정오, 영국의 새벽 네 시를 기다렸다.


결국, 멋지게 해냈다.
그 뿌듯함이란 —


몸은 분명 지쳐 있었고,
긴장이 풀리자 비로소 잠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마음은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졌기에,
그렇게 잠드는 순간조차 달콤했다.


런던의 새벽 네 시.
호주에서 맞이하던 새벽 네 시와는 다른 공기였다.
매일 같은 새벽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다른 나로 깨어났다.


이 과정은 런던에 머무는 내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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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다시 찾아보았다. 요즘은 이 단어 대신 어떤 표현이 쓰이고 있을까, 혹은 나의 오래된 꿈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에서였다.


역시나, 시대는 이미 다양한 언어로 그 '자유로움'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었다.


Remote worker / 원격 근무자
사무실이 아니라 집이나 카페, 혹은 여행지 등 —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는 사람. ‘노마드’가 지닌 여행의 이동성보다,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일의 방식’에 초점을 둔 표현이다.


Location-independent professional /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전문가
일이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인터넷이 연결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가능한 형태.
나의 일방식과도 꽤 닮아 있었다.


Virtual nomad / 가상 노마드
‘디지털 노마드’와 유사하지만, 물리적 이동보다 온라인 공간 속에서 일하고 소통하는 가상적 유목민을 가리킨다.


Global nomad / 글로벌 노마드
일의 방식뿐 아니라, 삶 전체가 이동으로 이루어진 사람들.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하나의 경계에 머물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다시 영국 여행을 떠올려보면,

그곳에서 나는 오래된 꿈 하나를 이미 이루고 있었다.

그 완성의 여백 속에서,

내 안의 더 큰 가능성이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경험은 내 안에서,

시간과 장소의 자유가 얼마나 깊고 조용한 힘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의 시선은 한국과 호주를 넘어,

세계로 향해 조금 더 또렷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음 꿈은 글로벌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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