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대학 투어를 마친 뒤,
부랴부랴 가족 만장일치로 향한 곳은 과학박물관이었다.
하지만, 문 닫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전시를 둘러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 하나의 목표를 정했다.
아인슈타인의 블랙보드.
아인슈타인이 옥스퍼드에 강연왔을 때, 사용했던 그 칠판이, 지금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날의 강연 주제는 우주론이었다.
이 칠판은 과학사 속 한 전화점의 순간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아인슈타인은
한때 정적이라 믿었던 우주모델을 뒤로하고,
우주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틀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본래는 지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칠판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 '정적으로' 영구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변화를 이야기하던 순간이
오히려 '멈춰진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 -
그 자체가 우주의 역설처럼 느껴진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과학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단순히 '과학'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 속에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인류가 지나온 역사적 전환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과학은 연구의 기록을 남기는 행위 속에서,
미래를 예고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관람을 마치고,
길 건너편에 있는 한 서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영국, blackwell 서점.
가장 오래된 체인이자,
당시 가장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서점이었다고 한다.
겉모습만 언뜻 보기엔 아담하고 평범한 서점처럼 보였지만,
서점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거대한 미로처럼 책장이 이어져 있었다.
북디자이너인 나에게 그곳은,
책이 단지 글을 담아내는 물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이자 아름다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지성 박물관 같았다.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는 이들의 사유는
이곳의 책에서 태어나,
다시 그들만의 책으로 되돌아와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 이곳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 또한,
오늘의 기록을 남기며
나만의 사유를 나의 역사로,
나의 책으로 이어가 본다.
어쩌면 오늘이,
내 역사의 전환점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