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reto principle Mar 17. 2024

MZ병사와 50대 군인의 정면충돌

불운이 행운으로 바뀌는 경우

그와 나눈 첫 마디.

대학 어디 나왔냐? 거기 돈만 주면 가는데 아니냐?


대민지원 갔다가 남는 낫을 하나 주워오게 된다.


너 낫질 할 줄 아냐? (그냥 들판)여기있는 풀 베라. 너 도시에서 자라서 내가 가르쳐 주는 거야


6개월만 전문하사해라. 왜 안 하냐 나가서 뭘 할 줄아는대?


다리를 다쳐 식당에 못 가니 비닐봉지에 주먹밥을 만들어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곡리 초소 가는 운행 중에 안 먹고 던져버린다.

엇! 차에 두면 제가 버리겠습니다. 길가에 쓰레기를 왜 던지십니까?

동물 밥 준거 아니야~!


어머니는 원래 무슨 일하다 주부냐? 동아일보? 청소부였냐? 사람이 일을 해야지~


한여름, 운행 나가니 차에서 대기해라 하고 1시간 뒤에 운행 취소됐다가 반복되었다.


저녁 12시에는 야식으로 컵라면을 담당해서 끓여왔다.


야! 니가 먹고 싶다 해서 끓이는 거야 내가 시킨 게 아니고 알지?


병사들이 모인 간담회 장에서도 장소를 불문하고 전투는 계속 되었다.


야 너 어디대 나왔다 했지? OO대 아는 사람?애들이 모른다잖아 어떻게 된거야?(비웃음과 함께)


대대장님의 부조리 교육을 같이 듣는 중 식단 메뉴 외우기도 부조리라는 내용이 나왔고 그 직후 지통실로 올라가는 운행에서 식단을 앞으로 외워서 브리핑하라는 말을 들었다. 너가 뭐 어쩔거냐는 태도였다. 물론 내가 할 사람도 아니었다. “박찬주 장군님을 보십쇼. 세상이 변했습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 요구는 계속 되었고 나는 브리핑까지는 하기가 싫어서 종이 식단표를 준비해서 차 옆구리에 넣어 놓았다. 식단표를 종이로 보기와 브리핑 받기로 한 달은 논쟁을 한 것 같다.


새벽 5:30분 순찰 후 하루 일과 진행. 일과 끝나고 저녁 5:30에 중대 소초로 운행. 행군 컨보이로 아침 7시까지 다시 운행. 근무취침은 점심밥 전까지만. 매주 수요일 반복되는 고된 운행도 참 많았다.


뭐 대충 생각나는 건 이정도다. 그가 악마 같은가? 나도 한때는 ‘박찬주 공관병 갑질 사건’처럼 보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저 말들 뒤에 아버지뻘 어른에게 나 역시 상당히 무례한 말들로 받아쳤기에 보내(?)버리기엔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량 반장님과 주임원사님은 종종 나를 대대장 운전병으로 보내면 어떨까라는 말을 했다. 난 안 가고 싶다고 했다. 육사 출신의 딱딱한 중령이 FM으로 살이찐 관사공관병을 매일 운동시키는 모습을 보고 개길수(?) 없는 한계를 느꼈다. 체력 특급이 될 때까지 개인 시간은 없다. 비빌 언덕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그냥 잘 받아치면서 사는 걸 택했다.


그래서 그를 증오하고 있나?


전혀 아니다.


종교의 힘으로 극복이라도 한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나는 오히려 자기 범위 안에서 컨트롤해 보려는 의지를 느꼈다. 방법이 예전 군대식 방법일 뿐이지만 50대, 군대에 한 평생을 바쳐온 그에게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했을 수도 있다.


50대와 20대가 말이 통한다는건 어느 한쪽이 맞춰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적어보라면 원사님이 더 부조리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말 못 할 사정이 얼마나 많겠는가. 월급 관리를 해준다고 월급을 매달 가져간 상사, 폭력, 폭언은 기본이다. 내게 이 정도로 사회생활을 가르쳐 준 것이 더 감사하다.


그리고 다른 이가 내 보직에 들어갔다면 아마 더 힘들어했을 것이다. 다행히 견디고 배울 수 있는 내가 들어갔고 적임자라 생각한다.


일도 참 많은 보직이었다. 주말에 쉰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주임원사님이 퇴근하면 직무대리로 행정보급관을 모시고 다녔다. 군용차가 지급되지 않는 보급관에게는 차량을 이용해 일 처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차량이 필요한 업무를 주중에 쌓아 놓았다가 몰아서했다. 이때부터 주말에 쉬지 않는 것이 억울하지 않게 되었고 주말에 남들보다 일을 더 한다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냐고? 전역 전 훈장을 받는데 올꺼냐는 질문에 식장에 방문할 것을 약속했고 1월이 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역 후 4월, 사단에서 열린 30년 훈장 수여식에 참석해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나는 ‘민관군’의 시민으로 돌아갔다. 진정성이 없었다면 불필요한 일이고 잘보인다고 얻을 것도 없지만 나의 ‘스승’으로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그 후로 감사하게도 전화도 오고 만나자는 연락이 몇 차례 왔지만 당시 수험생활을 했기에 만나지 못하고 여러 해가 지나가 버렸다.


꼭 지금 나쁜 것이 인생에 오점으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배워간다. 역설적이게도 내 인생에 꼭 필요했던 불운(?)이었다.

이전 12화 잘 된 곳이 계속 잘 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