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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그린 Dec 13. 2023

2. 회사에 대하여

건방지고 표독스럽게

문득 회사를 정말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PD를 정말 사랑하지만, 이 일이 나를 빛나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 일은 도에 넘치게 바쁘고 건강을 해친다. 도를 넘는 성취감을 주지만 이 일은 우리 부부의 비전에 맞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비전은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다. 얼굴을 마주하고 저녁밥을 함께 먹을 수 있으면 된다.

 

이제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며 살지 않으리. 자신 없는 편집과 기획에 대한 압박을 이겨내 보겠다고 새벽까지 일하고 밥을 굶어가며 일하지 않으리. 남들에게 부족해 보이지 않으려고 칭찬받고 싶어서 악착같이 나를 혹사하지 않을 거야.

 

나는 10년 넘게 PD로 정말 즐겁게 일했다. 모든 시간이 반짝였고 쉽게 접할 수 없는 많은 경험을 했다. 멋진 옷을 맘껏 입으며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일했다. 수많은 회의와 기획을 했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스타들과 촬영하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방송 스텝스크롤을 보며 매 순간 더없는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만큼 뾰족해지고 예민해졌다.

자존감을 넘어 자만심을 느꼈고 나 자신이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오디션 참가자들을 얕잡아 보며 단박에 맞다 아니다를 평가했다. 메인 PD랍시고 작가님에게 독설을 날리고 의견 첫마디에 그건 아니라며 잘라버렸다. 후배에게 대못을 박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으며 화도 많이 냈다. 정답 없는 기획과 편집에 내 말이 정답인 듯 녹설을 날렸다. 내가 후배이던 시절 그렇게 가슴에 못이 박혔는데 나는 내 가슴에 박힌 못을 뽑아 후배 가슴에 다시 박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상사의 말은 무조건 실행에 옮겼다. 나는 상사에겐 예스맨. 언제나 웃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결혼하고 내가 생각했던 결혼의 로망과 달라 심하게 일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일에 빠져서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돈을 아주 많이 벌 거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남편과의 대화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가부장적 언급이 나오면 불같이 화를 냈다. 남편이 나를 주부라고 말하면 나는 주부가 아니고 회사원이라며 집이 떠나가라 화를 냈다. 그리고 주부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고 제삿날 전 따위 굽는 주부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주부는 무조건 일하는 남편의 밥을 차려야 한다고 나도 만약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밥을 차릴 거라며 목소리 높였다.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으며 주인공 김지영이 저렇게 된 건 나약해서 그런 거라고 자기 운명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고 개척했어야 한다며 격분했다. 나약한 게 제일 싫다며 조금이라도 나약한 태도가 주위 동료, 지인들 특히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느껴지면 거침없이 반기를 들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너무 팽팽했던 나는 몇 번이나 부서졌다.

강한 건 깨진다. 부드러운 건 강함에 구부러졌다 펴진다는 걸 몇 번을 부서지고 알았다.

 

내가 감히 뭐라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가. 몇 줄의 이력만 듣고 어찌 그 사람이 나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건방지게 살아온 시간을 반성하고 딱 잘라 말했던 작가님에게 사과하고 정답 없는 이 방송에 대해 더없이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 됐다.

 

유함이 강함을 이긴다.

유해야 수많은 스텝을 현명하게 이끌 수 있다는 걸 깨지고 알게 되었다. 유하니 더없이 좋았다. 스텝들과 웃으며 일했고 성과도 더 좋았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전보다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다시 보며 조용히 김지영에게 공감했다. 그리고 주부를 존경하게 되었다.

 

비록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기획한 프로그램이 없고 대박 PD가 되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 그냥 PD라서 좋았다.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다. 회사가 주는 자부심과 소속감과 재정적 자유 또한 포기할 수 있다. 매 순간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도 좋다.

 

내 삶에 가장 가치 있는 일.

어쩌면 내가 태어난 이유.

 

멋지게 일하는 ‘PD’가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간절하게 그냥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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