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는 무럭무럭 자랐다. 피검 1차, 2차도 쉽게 통과하고 아기집과 반짝이는 심장도 보여주었다. 난임병원에서는 이전의 조산력이 걱정된다며 9주 차에 서둘러 산과로 가라고 하셨다. 자연임신으로 난임병원을 졸업하다니! 자연임신이란 참 좋구나. 주사 하나 맞지 않고 이렇게 간편하게 임신이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9주에 유명한 선생님을 소개받아 산과를 방문했다. 백과사전 보다 두꺼운 내 의무기록지도 함께 전달드렸다. 조산으로 힘들었겠다며 아가를 먼저 보고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11주에 니프티를 통과하면 바로 자궁경부를 묶는 수술을 하자며 아기 초음파를 봤다. 그때 아가는 9주에서 10주를 향해 커가고 있었다.
초음파를 볼 때면 기분이 묘하다. 저 작은 생명이 내 뱃속에 자리 잡고 있다니! 비록 자궁에 10센치도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초음파를 보는 순간 내 마음 무한히 아가가 자리를 잡는다. 이 벅찬 감정으로 초음파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나에게 더 이상의 슬픈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계류유산도 해봤고 화유도 해봤고 20주 아가도 보내봤다. 이 보다 더 슬픈 시나리오가 있을 리 만무했다. 머릿속에 그려본 적도 없었다. 하늘도 이제는 나에게 행복을 주셔야 하지 않겠냐고 설마 신이 또다시 나에게 슬픔을 주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초음파를 보시던 선생님께서 아가의 목투명대가 너무 두껍단다. 하지만 목투명대는 보통 10-12주에 판단하므로 다음 주에 다시 두께를 보자고 하셨다. 뽑아주신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고 목투명대를 보았는데 정말 두꺼웠다.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정하며 집에 돌아와 목투명대 관련 글을 찾아보았다. 3mm 이상으로 걱정이라는 부모들의 글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내 아가의 목투명대는 많이 두꺼웠다. 그러고도 건강한 아가를 낳았다는 글을 검색하며 희망을 찾고 또 찾았다.
분명 몇 분 전까지 천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지옥의 입구에 서있다. 이번에 다시 또 지옥에 빠진다면 나는 과연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절망 보다 더 큰 절망. 다시 지옥이라면 악을 쓰고 이겨낼 힘이 내겐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아직 최종 선고를 받지 않았기에 희망을 그리며 아가야 우리 목투명대 반으로 줄이자. 우리 아기 건강하자. 아가에게 말하고 나에게 말하고. 그렇게 지옥의 입구에서 한주가 흘렀다.
10주가 되었고 다시 초음파를 보았다. 절망적 이게도 목투명대는 이전보다 두배로 두꺼워져 있었다. '아... 제발 나를 버리지 마세요'. 선생님께서 양수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오늘 검사를 하면 내일 바로 결과가 나온다고 하셨다. 양수 검사는 너무 무서웠다. 아가가 자리 잡은 자궁으로 바늘을 집어넣고 아가를 피해 양수를 뽑아내야 했다. 초음파를 보면서 바늘을 넣는데 혹여라도 아기를 건드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 양수 검사를 하고 나와 의자에 앉았는데 알고 보니 분만장 앞 대기실이었다. 다들 아기를 낳는 분만장에서 나는 양수 검사를 했구나. 곧 태어날 아가를 기다리는 예비 아빠들 사이에서 나의 신세가 참으로 초라하고 슬펐다. 참았던 눈물과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누가 보든지 말든지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에게 왜 이렇게 가혹한 운명을 주시나.
나는 어찌 살아야 하나.
그곳에 앉아 한 시간을 소리 죽여 울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가에게 말했다. 나는 참으로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다. '아가야 혹여라도 네가 아프다면 엄마에게 조금 일찍 말해주겠니?'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 15주를 넘긴 아이를 다시 분만으로 떠나보내야 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 만약 아프다면 지금 떠나보내고 싶었다. 그때의 고통과 슬픔을 다시 겪는다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아가보다 나의 고통을 먼저 걱정하는 죄 많은 엄마였다.
아가는 11주가 되었고 다음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21번 염색체 이상으로 다운증후군이라고 하셨다.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려다준 태명처럼 행복만 준 행복이가 아프단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키우는 것이 꿈인 남편과 나는 냉정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짐을 싸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정함 속에 슬픔이 잠시 모습을 숨겼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가 엄마 아빠가 정말 미안해.
나는 다시 자궁문을 여는 약을 넣었고 약간의 진통을 느꼈고 약을 넣고 세 시간 만에 아기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소파수술을 했다. 살아 있는 아이를 보냈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잔인해 죄책감도 눈을 감고 슬픔도 눈을 감았다. 내 마음이 어둡고 깊은 심연으로 쭈욱 가라앉았고 있었다.
소파수술 후 입원실에서 깨어났다. 내 옆으로 3명의 환자가 더 있었다. 아가를 떠나보내면서 울지 않았는데 내 옆에 3명의 환자가 실은 곧 출산을 앞둔 만삭의 산모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울음이 쏟아졌다. 남편에게 나를 왜 이곳에 입원시켰냐며 가혹한 거 아니냐며 소리치며 울었다. 저기 밑에 숨어 웅크리고 있던 슬픔이 폭발해 간호사도 남편도 아무도 나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1인실로 자리를 옮기고 새벽 밤이 되어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자식의 장례를 치러야 했던 참으로 원통했던 일부터 다시 떠나보낸 아가와 지난 시간들에 대해 조용히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서로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며 그 틈 사이에 작은 희망 또한 이야기했으리라.
그렇게 나는 또다시 아이를 보냈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 마음이 저기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