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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그린 Apr 03. 2024

내 처지에 대하여

나를 위한 몇 가지 규칙

마지막 선택 유산은 내 모든 걸 할퀴고 지나갔다. 몇 달 전 이 보다 더 끔찍했던 20주 유산땐 울고 불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슬프다고 사방팔방 떠들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걸 함구하고 내 안으로 깊이 움츠러들었다. 슬픔 앞에서 슬퍼하지 않는 아주 이상한 애도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첫 번째. 자극받지 않기

세상 모든 기쁨과 웃음이 나에게는 자극이었다. 예능에서 웃고 떠드는 장면, 드라마에서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장면, 뉴스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나를 자극했다. 그래서 TV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제일 많이 자극시키는 것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소식이었다. 임신, 출산, 아기라는 단어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평온했다. 평온했다기보다 잠잠하게 가라앉아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지인의 출산 소식부터 일면식도 없는 연예인의 출산, 임신 소식까지 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차단했다.


두 번째. 연락 끊기

가족 외 지인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절친, 존경하는 선배, 아끼는 후배, 친한 동료 등 내 처지를 아는 모든 사람의 연락과 만남을 거부했다. 텅텅 비어버린 채로 그들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 안을 채워야 했다. 내 소식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으리. 부디 나의 안부를 묻지 말아 주오.


세 번째. 그 어떤 위로도 받지 않기

내 처지를 알고 건네는 위로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진심 어린 위로를 받아도 상처를 받던 나였다. 내가 가진 슬픔의 크기를 더 크게 짐작해 위로받거나, 더 작게 축소해 위로를 받으면 마음이 슬프고 아팠다. 이 슬픔의 크기는 나만 아는 건데,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건데, 용기 내 건네는 위로가 얼마나 소중한데... 나는 이런 생각을 모두 다 뒤로하고 한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네 번째. SNS, 블로그 어플을 다 삭제할 것

블로그는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내 일상을 글로 기록하며 예쁘게 꾸몄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수십 번이나 희망을 이야기하며 감사일기를 적었었다. 진심으로 응원을 해주는 이웃들도 있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재임신을 했다 것도 알아차렸으리라. 그렇게 희망을 외쳤건만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내 힘을 그 공간에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진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아끼고 아껴 치유해야 했다.


다섯 번째. 철저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것

철저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로 했다. 그중에는 별난 기행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즐거워지는 것들이다. 내 고향 통영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안겨 하루를 보내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맘껏 읽었다. 그리고 갑자기 저기 멀리까지 내달리고 싶으면 머리가 젖혀질 만큼 빠르게 질주했다. 푸른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바다 수영을 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겨우 참고 수영 수업을 수강했다(나는 참고로 수영을 못한다). 저기 외딴 통영 섬으로 들어가 백패킹을 하고 싶었다. 아주 작은 텐트에 몸을 숨기고 혼자 웅크린 채로 하루종일 숨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텐트와 침낭과 배낭을 샀다. 작은 텐트 속에서 혼자 잠을 자고 싶어!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하지 않고는 미쳐버릴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은 다 싫었다. 지금 내 상황에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 총균쇠, 코스모스 같은 책에 푹 빠져 하루종일 탐독했다. 해가 뜨면 책상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채 책을 펼쳤고 해가 지면 조용히 책을 닫고 잠을 잤다. 슬픔에서 나를 건져 올렸던 그림은 단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 내 슬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에 대고 왜 나인지. 왜 또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묻지 않았다. 신에게 물었으나 이내 포기했다.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질문도 같이 흘러 보냈다. 그렇게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슬픔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더없이 좋았다.

행복한 시간이었고 지금도 참 행복하다.

정말 마음이 더없이 좋다.


앞으로도 나는 한참을 이렇게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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