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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그린 Apr 10. 2024

치유의 시간

3주의 산후조리가 끝났다. 특별히 산후조리라 할 것도 없었지만 걱정이 많은 남편은 절대 외출 하지 말고 찬바람을 쐬지 말라고 했다. 창밖으로 조용히 봄이 오고 있었다. 작년 봄에 까꿍이를 보내고 올봄에 다시 행복이를 보냈다. 연두색으로 돋아나는 들판과 나무들 사이로 숨어든다면 내 상처도 치유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 나 통영에 좀 다녀올게요"

내 고향 통영에 가고 싶었다. 나를 이렇게 키워낸 통영. 그곳이라면 나에게 안식을 줄 것 같았다.



통영도 봄이 한창이었다. 아빠 엄마가 출근을 하면 조용히 밖으로 나와 통영에 나를 맡겼다. 바다의 물결과 햇빛이 만들어낸 반짝이는 윤슬을 한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해안길을 따라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네까지 몇 시간이고 걸어가 보기도 했다. 통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았다. 매일 통영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어떤 날은 바닷가에서 고동을 잡았다. 갯바위 여기저기 숨어 있는 고동을 주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편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신에게 묻던 질문을 까맣게 잊고 고동을 주은 것이다. 명상을 해도 안되던 무념무상이 고동을 주으면서 성공하다니. 단순한 반복 행위가 이렇게 마음에 안정을 주는구나. 그 이후 고동 줍기는 나에게 명상의 시간이 되었다.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 아빠는 어디서 이렇게 매일 고동을 많이 주워오냐며 깜짝 놀라곤 하셨다. 덕분에 저녁 반찬이 푸짐했다.



통영은 바다도 아름답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산등성이마다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생각해 보면 통영에 살면서 골목골목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 도저히 세간살이를 들고 올라가지 못할 것 같은 좁고 가파른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통영에 이런 곳이 있구나! 골목을 어지럽게 채우고 있는 낡고 오래된 집들을 스칠 때면 골목 사이마다 굽이쳐 흘렀을 이곳의 삶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지내면 지낼수록 내 고향이라 막연하게 좋아했던 통영이 점점 더 좋아졌다. 창밖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도서관에 들러 통영 역사, 지리, 향토, 문학에 관한 책을 왕창 빌려와 읽었다. 제일 먼저는 박경리가 쓴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다. 이 책 제1장에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통영을 묘사하는 서문이 있는데 나는 그 부분이 너무 좋았다. 글을 읽으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의 통영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책에서 설명하는 장소를 찾아가 오디오북을 들으며 변해버린 풍경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곤 했다. 어떤 날은 제승당 마루에서 어떤 날은 통영 북포루에서 통영의 과거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위안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참으로 평온했다.



과거 여행이 끝나갈 때쯤 통영 섬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래! 통영의 바다가 아름다운 건 보석 같은 섬을 품고 있기 때문일 거야. 많은 섬 중에 연화도를 찾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보덕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함께 온 엄마는 나보다 더 열심히 섬 곳곳에 숨어 있는 암자를 찾아 나를 위해 절을 하고 시주를 했다. 괜찮냐고 마음이 아프지 않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고 묵묵히 내 옆에 있어 준 우리 엄마는 나보다 더 내 행복을 간절히 빌었고 나 자신 보다 더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이 흘렀다. 눈을 감아도 통영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질 만큼 내 마음이 통영으로 가득했다.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가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가진 상처와는 전혀 관련 없는 것들로 3주를 보냈는데 오히려 그 쓸데없는 것들이 내 상처를 아물게 해 주었다.


텅 비던 마음을 채워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대청소를 하고 생각만 하던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첫 번째로 수영을 배웠다. 매주 화, 목 오전 수영을 했는데 수영장을 갈 때마다 휴양지에 놀러 가는 느낌이었다. 물속에서 느끼는 자유는 또 다른 느낌의 해방감이었다. 두 번째로 운전 연수를 했다. 언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 활동 범위가 무한대로 넓어지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세 번째로 필라테스를 수업을 들었다. 거의 매일 수업을 들었는 데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을 사용하며 내 몸을 쫙쫙 늘리는 것이 참 상쾌했다. 네 번째로 혼자 백패킹을 했다. 작은 텐트의 침낭 속에서 혼자 잠을 청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게 어찌나 재밌고 웃음이 나는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다섯 번째로 책을 읽으며 하루의 나머지를 채웠다. 그중 박완서의 책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희망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은 읽지 않았지만 딱 하나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내가 이 시련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바다 수영을 했다. 통영 바다를 볼 때마다 바닷속으로 풍덩하고 몸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수영을 배웠으니 실행에 옮겨야지. 내 고향 통영이 품고 있는 비진도라는 보석 같은 섬에서 신나게 바다 수영을 했다. 바닷속에 얼굴을 담근 채 왕왕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물속을 구경했고 다시 반대로 몸을 돌려 파도에 몸을 맡기 채 둥둥 떠서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내 마음이 점점 단단해지고 건강해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다시 집으로

눈부신 쪽빛 바다 위 보석 같은 섬이 떠 있는 곳

송이버섯처럼 촘촘히 박힌 낡은 집 사이에

사랑하는 내 부모님의 삶이 계속되는 곳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키워내고

다시 조용히 내 울음을 삼켜주는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내 고향 통영을 뒤로하고

드디어

드디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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