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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그린 Apr 17. 2024

퇴사를 하며

새로운 여정의 시작

나는 2023년 9월 30일 자로 백수가 되었다. 대학교 졸업도 전에 인턴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안정감이었고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었다. 그렇게 어디의 회사원으로 15년을 일했다.


PD라는 직업을 정말 사랑했다. 어릴 적 가슴에 품었던 소중한 꿈이었고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일이었다. PD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가슴이 벅찼고 새벽 늦은 퇴근조차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었다. PD는 내 인생이었고 삶의 전부였고 꿈이자 믿음이었다.


PD가 아닌 나로 살 수 있을까?

PD 아무개가 아닌 그냥 아무개로 살 수 있을까?


성공인 줄 알았다. 이 정도면 잘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PD가 주는 만족감에 건강과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일했다. 소속감과 일에 중독된 나는 퇴사를 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부서질수록 더 강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세 번째 유산 후 조용히 때가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때가 되어 바다에 밀물이 들어오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시간이 오고 있었다.


내 삶에서 PD 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퇴사를 하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한다.


꽉 쥔 주먹을 펴는 데만 2년이 걸렸고

그렇게 어렵게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할 때 내 모습을 떠올려보자. 신나게 일을 하다가 시험관과 유산을 하고 그러다 1년 난임 휴직을 했다. 임신을 했으나 20주에 중기 유산을 했고 만신창이가 되어 복직을 했다. 나는 나 자신이 슬프고 불쌍했고 초라하다 생각했다. 예전처럼 밤을 새우며 일할 수 없어 기획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에서도 난임 병원에서도 작고 초라해지기만 했다. 아무도 나를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거기에 가두었다. 다시 임신이 되었고 다시 휴직을 하였고 다시 또 유산을 하였다.


나는 드디어 패배를 인정했다.


남들이 내 퇴사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그거 알아? 그 사람 퇴사했잖아!

어머 대박! 퇴사했어?

응응!

완전 유산 많이 하고 그랬잖아.

임신이 안 돼서 퇴사하잖아.

보통은 이직하는데 퇴사라니 쇼킹이다.'


나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퇴사할 때 내 모습이 어땠어야 하는가?

국장이 되었어야 하는가?

나영석 같은 대박 프로그램을 만든 PD였어야 하는가?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만든 프로그램을 가진 PD였어야 하는가?


'너는 퇴사할 때 내 모습이 어땠길 바랐던 거니?'


나는 나에게 대답했다.

그렇다. 퇴사할 때 내 모습이 어때야 하는 건 없다.

대단한 사람으로 퇴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이것이 지금의 내 선택이고

나는 이 선택이 옮음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겠다.


지금이 바로 퇴사할 '때'이고

지금 내 모습이 정답인 것이다.


이렇게 답하고 나니 작고 초라해지지 않았다.

미련 없이, 아쉬움 없이

손에 쥐었던 티켓을 조용히 내려놓고

달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드디어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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