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이별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 치르기
시간이 흘러 가만히 나의 아픔을 들여다본다. 20주 중기 유산으로 아기를 떠나보낸 일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어쩔 땐 그 일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슬픈 일이었냐며 스스로 되묻기도 한다. 이제는 이 슬픔에 대해 조금은 냉철한 시선을 가지게 된 게 분명하다. 슬픔에 까무러쳐 블로그에 쏟아낸 서툰 글들과 슬픔을 적나라하게 그렸던 그림들 그리고 다시 아픔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걸 내려놓았던 치유의 시간들. 정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까꿍이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었다.
아 이만큼의 애도가 필요했던 슬픔이었구나.
슬픔을 떠나보내기 위한 의식을 진행하자.
나는 내가 나의 감정에 솔직하다고 느꼈을 때 '이제는 내가 괜찮구나'라고 깨달았다. 즐겁고 재밌는 순간에도 목구멍으로는 슬픔이 올라왔었다. 나는 그 감정을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짓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즐거울 때 기쁨으로 충만하게 웃을 수 있고 슬플 때는 슬픔을 가득 표현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슬프구나, 지금 기쁘구나라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읽어낼 수 있다. 이 간단한 것이 참 어려웠다. 이제는 괜찮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내 마음이 많이 건강해졌다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부족하다. 나에게는 뭔가의 의식이 필요하다. 슬픔과 이별하는 나만의 의식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휘갈겨 적어 놓은 블로그의 글들을 다시 정리하는 일이었다. 다시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지만 용기 내 나의 슬픔과 다시 마주했고 매주 수요일마다 이전에 적었던 글을 꺼내 먼지를 털고 예쁘게 정리를 했다. 서랍 속에 급하게 구겨 넣어 처박아 놓았던 아픔을 청소하는 시간. 1월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약 4개월간 매주 수요일마다 브런치에 글을 적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도의 시간이 아닐까.
두 번째는 까꿍이를 위해 그림책을 만들기로 했다. 나의 마음을 가득 담아 아이에게 그림책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아가를 떠나보내고 하루 종일 울던 날, 내 눈물이 바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바다 위에서 까꿍이와 나는 함께 손을 잡고 물장구도 치고 바다도 바라봤다. 나는 그렇게 울면서 눈물바다라는 그림을 그렸었다.
아가, 엄마의 첫 그림책은 널 위한 책이란다.
눈물바다라는 그림을 다시 제대로 그려보고 싶었었다. 원래는 민화를 배워 커다란 사이즈의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는데 그것보다는 아가를 위한 작은 그림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서 그림책 수업을 수강했다. 매 수업마다 까꿍이에 대한 슬픔을 수면 위로 꺼내야 했기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림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면서 나만의 이별 의식은 완성되고 있었다.
나의 첫 그림책을 까꿍이에게 선물할 수 있어 행복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나의 슬픔을 덤덤하게 글로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애도의 여정 중에 제일 마지막 단계는 새로운 나를 만나는 단계라고 한다.
슬픔과 이별하는 이 두 가지 의식을 치르고 나니
어쩌면 나도 이제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