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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그린 Mar 20. 2024

지옥에서 천국으로

임신을 위한 1년의 휴직이 시험관, 임신, 중기 유산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퇴직을 하려 했으나 용기를 내지 못했고 만신창이가 되어 복직했다. 동료들은 그대로였지만 휴직 전의 나와 휴직 후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중기 유산의 상처가 아물지 못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으리라.


복직 전 회사 선배를 만나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감정을 숨기고 이성적으로만 행동해도 모자란 회사 생활인데 나는 내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적나라하게 상처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이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지 동료들의 슬픔이 될 수는 없었다. 이곳은 회사였고 그들은 내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처럼 상처가 아프다고 위로해 달라고 계속해서 떼를 쓸 수 없었다. 


복직 후에도 시험관으로 임신을 하고 싶어 하는 나를 딱하게 여긴 선배님께서 제작부서에서 기획부서로 배정을 바꿔주셨다. 덕분에 나는 밤을 새우는 업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보통 사람들처럼 저녁 6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편집과 촬영 대신 프로그램 레퍼런스를 찾고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몸이 덜 힘든 업무였다. 


내가 원한 업무인데 밤을 새우며 일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여러 감정이 들었다. 내가 바보 같기도 하고 회사에서 쓸모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나만 밤을 새우지 않는다는 죄책감 같은 것도 느꼈다. 다들 프로그램을 만들며 자신의 경력 한 줄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는데 나는 멈춰있는 것 같은 불안감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 속에서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이중적 이게도 쉬면서 임신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이었다. 그렇다 나의 1순위는 일도 성과도 경력도 아닌 임신이었다. 임신을 해야만 이 슬픔에서 구원받고 다시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가끔 사무실에 앉아 내일 있을 회의를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보면 갑자기 내 영혼이 밖으로 빠져나와 나에게 말하곤 했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거야?', '정신 차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곳에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동시에 슬픔을 겪은 나를 배려하는 동료들의 시선을 느낄 때면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초라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순수한 동료들의 시선에 내가 그 프레임을 씌웠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괜찮은 척했고 많이 웃었고 씩씩하게 말을 했다. 점점 밝았던 과거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나을 보면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밝은 척하는 내가 너무나 싫었다. 


그렇게 나의 하루하루는 지옥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생각했다. 이곳이 바로 지옥이구나. 나중에는 '지옥이야'라며 소리 내어 말하기도 했다. 밤마다 악몽 속에서 울었고 울면서 잠에서 깼다. 분명 꿈속의 슬픔이었는데 일어나서도 그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아침을 시작했고 울며 출근을 했고 수많은 생각에 사로 잡혀 업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또 울었다. 그리고는 다시 잠들기 전까지 울다 잠이 들었다. 이런 마음 상태로 시험관을 했으니 난자가 건강할 리가 없었다. 복직 후 진행한 난자 채취 결과는 PGT 통과 배아 0개로 처참했다. 그렇게 2022년이 끝났고 2023년 1월이 되었다.


분명 어제까지 지옥이었다. 어제도 눈물을 흘리며 잠에 들었었다. 그런데 아침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임테기를 해보고 싶었다. 시험관 휴지기라 쉬는 동안 자연 임신을 시도했었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자연임신이 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실패겠지. 그런데 두줄이었다. 아... 설마 나에게 다시 아기가 찾아온 건가?! 아... 설마 설마... 나 진짜 임신인가 봐... 떨리는 손으로 연달아 임테기 2개를 더 해봤다. 모두 다 두줄이었다. 


아... 여기는 천국이다. 분명 몇 초 전까지 지옥이었는데 이 연한 임테기 두줄이 나를 지옥에서 살포시 건져내 천국에 내려다 줬다. 슬픔만 가득하던 내 마음이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찼다. 다음날 서둘러 난임병원을 찾았고 피검 결과 진짜 임신이었다. 남편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무슨 용기였는지 난황, 아기집을 보지도 않았는데 시댁, 친정에게 소식을 전했다. 


운이 좋게도 회사에 임신 휴직이라는 제도가 생겼더라. 임신 주수에 상관없이 임신확인증만 있으면 바로 휴직이 가능했다. 나는 확인증을 받자 말자 휴직을 했다. 일과 육아, PD와 엄마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드디어 하늘이 답을 한 것 같았다. 이번 휴직에 무사히 출산을 하고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출산&육아 휴직을 하고 다시 복직을 해야지. 그래 이게 하늘의 계획이었구나. 휴직 중에 회사에서 보내주는 임신 선물도 받았다. 매일이 행복으로 가득했다. 


남편은 아가에게 행복이라는 태명을 지어주었다. 중기 유산 후 다시 올 아이를 위해 남편이 미리 정해둔 태명이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리.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병원도 여러 군데 잘 찾아봐서 최고의 선생님에게 가야지 싶어 대학병원 여러 곳을 예약하고 진료를 봤다. 


그렇게 임신 10주가 되었고 아기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랐다. 태어나면 토끼띠가 될 아이라 감사한 마음에 토끼 그림을 계속 그렸다. 정말 매일이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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